[풋볼리스트] 서호정 기자= 언젠가부터 K리그는 아름다운 축구에 집착하고 있다. 정교한 패스와 뛰어난 기술, 눈을 즐겁게 하는 화려한 축구가 절대적인 지향점이 된 분위기다. 하지만 축구의 매력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머리와 눈이 아니라 가슴과 심장으로 느끼는 축구도 있다. 빠르고 박진감 넘치며, 다소 과격하지만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축구. 몸과 몸이 부딪히는 격렬함에서 느끼는 짜릿함은 축구의 가장 원초적 매력이다. 승리에 대한 한 없는 욕심과 상대에 대한 분명한 적개심이 극도의 집중력과 진지한 자세를 이끌어 내고 그것이 관중들에게 세포 하나하나가 반응하는 듯한 기분을 주는 것이야말로 축구다.
6월 20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서울과 수원의 FA컵 16강전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축구의 진짜 얼굴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야성의 본질이 그릇되면 야만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경고도 숨어 있었다.
▲ 더비의 전면, 집념과 야성을 보다
최근 리그에서 수원에 4연패를 당한 서울은 대진이 확정되자마자 더 이상 패배는 용납할 수 없다는 정신적 무장의 분위기를 선수단과 구단, 팬들이 뿜어냈다. 윤성효 감독 부임 후 확실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수원은 이번에게 이기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원정임에도 대규모 서포터가 응원에 나섰다.
예상대로 경기는 초반부터 과열됐다. 경기 시작 2분 만에 김진규의 도전적인 플레이에 라돈치치가 쓰러졌다. 무릎 내측 인대를 다친 라돈치치는 전반 4분 만에 교체돼 나갔다. 수원도 서울의 주장 하대성을 강력한 몸싸움으로 그라운드에 눕게 만들었다. 에벨톤C와 고요한은 측면에서 첨예한 신경전을 펼쳤다. 보스나는 친구 데얀이 공을 잡으면 육중한 몸을 날려 하드태클을 구사, 그라운드 위에선 우정이 별개의 문제임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런 플레이들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불편하게 만들진 않았다. 오히려 모처럼 만난 날 것 그 자체의 경합에 관중들은 탄성을 질렀다. 움직임 하나, 태클 하나에 경기장 내의 모든 이들이 집중하고 있었다. 파울 42회, 경고 7회, 퇴장 1회. 수치로만 보면 난폭했지만 정작 경기를 본 이들에겐 그렇게 기억되진 않았다.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분명 양팀 선수들은 축구와 폭력의 경계를 확실히 그어가며 뛰고 있었다.
몰리나가 자신이 얻어 낸 페널티킥을 찼지만 정성룡이 선방하며 막아내자 분위기는 더 달아올랐다. 그리고 선제골은 의외의 시점에, 의외의 인물에게서 터졌다. 전반 40분 오범석이 오른쪽 측면을 파고 들어와 올린 크로스가 김주영의 발을 맞으며 서울 골대 안으로 들어간 것. 이번 경기를 앞두고 페이스북을 통해 서울전에 대한 각오를 남달리 표현해 수원 팬들로부터는 지지를, 서울 팬들로부터는 험담을 들어야 했던 오범석이 만들어 낸 복잡한 의미의 골이었다.
후반 8분 스테보가 또 한번 예상치 못한 프리킥 골을 터트리며 수원은 확실히 승기를 잡았다. 올 시즌 첫 슈퍼매치에서 고요한에게 부상을 입힌 전력 탓에 ‘반칙왕’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던 스테보는 경기 후 자신이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빅매치의 왕’이기도 함을 증명했다. 그의 슈퍼매치 3경기 연속 골이었다. 오범석에 이어 스테보까지, 양팀 서포터들이 바라보는 시각이 극단적인 선수들이 승부를 결정짓자 그 감정도 극적인 변곡점을 그려나갔다.
분명 그런 과정도 슈퍼매치의 격을 올리는 요소였다. 축구가 지닌 본성, 서로를 이기고 싶어하는 욕망과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신경전에 대한 갑론을박들. 그라운드에서 날 것 그 자체의 경합과 집중력이 극도에 달하면 아름다운 기술, 화려한 골이 나오지 않아도 경기 수준은 올라갈 수 밖에 없다. 최근 K리그가 이런 더비, 저런 더비를 만든다고 하지만 라이벌전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역사적 배경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사건, 사고, 명승부가 퇴적되면서 자연스럽게 진화하는 것이다. 적어도 후반 중반까지 두 팀이 보여준 것은 승리에 대한 집념에서 빚어진 진성성과 야성이라는 더비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들이었다.
▲ 더비의 이면, 야만과 상처를 남기다
승패를 떠나 양팀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을 수 있었던 수준 높은 경기는 막판에 변질됐다. 또 한번의 패배에 자존심 상한 서울 선수들의 발은 높이 올라가기 시작했고 수원 선수들은 거기에 강력히 반응했다. 결국 경기 초반부터 악역을 자처한 김진규가 오장은을 쓰러트렸다. 김진규가 자신의 머리를 만지고 가자 오장은도 발끈했다. 이후 양팀 선수들은 물론 윤성효 감독, 최용수 감독까지 얽히고 설킨 육박전이 벌어졌다. 한켠에서 또 맞닥뜨린 박현범과 김태환은 주먹을 휘두르는 장면까지 보여줬다. 절제되지 못하는 야성이 야만으로 돌변하는 순간이었다.
더비에 생긴 상처의 크기는 경기 후 낯선 풍경으로 인해 더 벌어졌다. 수원 구단 직원은 서울 구단 직원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수원 2군 선수단의 경기장 무료 입장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것이 발단이 됐다. 그 문제로 수일간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한 수원 구단 직원은 화해를 하려고 만난 자리에서 주먹을 휘둘렀고 서울 구단 직원은 구급차에 실려 인근 병원으로 향했다. 수원 측은 “사소한 다툼이었다”고 해명했지만 서울 측은 “응급실에 갔고 목에 깁스를 했다”며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말했다. 수원 측도 '모욕죄'로 맞고소하겠다는 입장이다. 만일의 상황이 나면 중재에 나서야 할 프런트 간의 감정 싸움, 그리고 폭행으로 이어진 결말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그 뒤에는 서울 서포터들이 상처를 더 밟았다. 수원전 5연패에 뿔난 30여명의 서포터들은 최용수 감독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선수단 버스를 가로막고 나섰다. 선수단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출입구까지 몰려와 “최용수 나와”를 외쳤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구단은 인근 경찰서에 연락을 했고 형사와 경찰들이 출동해 소요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한 팬은 출동한 경찰차 위에 올라서 버스를 향해 욕을 하는 호기를 보였다. 결국 그 팬이 연행되었고 선수단 버스는 출발했지만 입구에서 기다리던 20여명의 팬들이 스크럼을 짜고 길 위에 드러누우며 2차 저지가 시작됐다. 일부 팬은 “팬들이 대화 좀 하자는데 경찰을 부르는 구단이 어디 있냐”, “이런 식이면 N석 응원 안하겠다. 우리가 N석 출입까지 막겠다”며 으름장과 협박을 했다.
서울 구단은 팬들의 원성에 고개 숙인 채 진정을 부탁할 수 밖에 없었다. 서울 선수들은 1시간 30분 가까이 경기장을 벗어나지도 못한 채 버스 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결국 서울 구단이 “한달 내에 최용수 감독과 만나는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약속을 하고서야 팬들은 물러났다. 프로스포츠가 대기업의 팬 서비스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스포츠의 현실에서 팬은 응석받이 상전이고 구단은 하인일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실소를 감출 수 없었던 것은 현재 서울은 K리그 1위이며, 이날 패배는 올 시즌 홈에서의 첫 패배였고, 그런 성공적인 결과물을 이끈 인물은 부임 1년 차인 최용수 감독이라는 사실이었다. 라이벌전에서의 연패로 인한 상실감은 컸지만 패배에 대한 소명을 직접적으로 요구하고, 선수들 앞에서 감독이라는 리더의 자존심을 짓밟을 권리는 팬들에게 없었다. 분명 야만적이고 비이성적인 시간이었다.
슈퍼매치는 명실상부한 K리그의 최고의 컨텐츠다. 경기장 위에서 보여주는 야성미 넘치는, 더비다운 경기는 환영한다. 그러나 절제되지 못한 비이성과 통제되지 못하는 행동을 거절한다. 슈퍼매치가 슈퍼저질매치가 돼서는 곤란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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