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18일 월요일

오로지 팀 성적… 대기록엔 관심 없는 야구계







야구만화를 그리는 최훈 작가가 물었다. “요즘 이상하지 않아? 너무 잠잠해.” 삼성 이승엽 얘기다. 한·일 통산이라고는 하지만 혼자 때린 홈런 500개가 눈앞이다. 최 작가는 “500개면 벌써 들썩거리고도 남았을 텐데”라고 했다. 2003년 한국프로야구는 이승엽으로 시작해서 이승엽으로 끝났다. 시즌 중반 300홈런을 때렸을 때, 그 공의 가격은 1억원이나 했다. 56홈런을 앞두고는 구장마다 잠자리채가 넘실거렸다. 아무리 두 리그를 합했다 하더라도, ‘500’이라는 숫자가 주는 무게감은 만만치 않다. 최 작가는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9년 전, 이승엽의 모든 홈런은 이야기를 가졌다. 그해 개막전에서 이승엽은 박명환을 상대로 홈런 2개를 때렸다. 통산 300호 홈런을 때린 날은 SK 조웅천으로부터 끝내기 만루홈런으로 301호를 만들었다. 시즌 53호를 때린 뒤 10일 동안 홈런이 없을 때 아내 이송정씨는 “오빠 밀어쳐”라고 했다. 이승엽은 54호째를 정말로 밀어쳐서 넘겼다. 상대는 LG 김광수였다. 56호째는 아내가 ‘호랑이 꿈’을 꿨다고 했다. 이승엽은 홈런을 때린 뒤 “기분이 찢어지게 좋다”고 했다.

취재 열기가 뜨거웠다. 삼성 김응용 감독은 어느 날 취재진의 더그아웃 출입을 금지했다. 테이프로 줄을 그어 더그아웃 앞을 막고 취재를 제한했다. 팀 분위기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노회한 코끼리 감독은 잘 알고 있었다. 전년도 우승팀 삼성은 준플레이오프에서 SK에 연패해 탈락했다.

이승엽은 요즘 모든 인터뷰를 사양하고 있다. 구단도 이승엽의 500홈런과 관련해 침묵하고 있다. “기록을 달성하면 시상식을 한다”는 게 전부다. 삼성 관계자는 “이승엽이 자신에게 관심이 몰리는 것을 극도로 부담스러워한다”고 전했다. 현재 팀 성적이 주춤거리는 것도 이유다. 이승엽은 9년 전 일을 기억하고 있다. 개인의 영광보다 팀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뜻은 역시 이승엽답다.

그러다 보니 오승환의 통산 세이브 최다 기록도 조용히 지나가고 있다. 마리아노 리베라가 트레버 호프먼의 기록을 바꿨을 때 메이저리그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삼성은 보도자료 한 장 내지 않았다. 팀 성적도 좋지만 팬들에게는 ‘역사’를 즐길 권리도 있다. 한 시즌의 기록도 중요하지만 ‘누적 기록’은 더 큰 의미를 갖는다. 하나하나가 모여서 쌓인 기록은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함을 드러낸다. 야구의 기록은 꾸준히 걷는 한 걸음의 중요성을 그 어떤 교과서보다 잘 알려준다.

그래서 더 아쉽다. 각각 3개씩만 남겨놓은 500개의 홈런, 227개의 세이브가 팀 성적 때문에 조용히 넘어가고 있다. 야구도 성적지상주의에 갇혔다. 리그는 온통 ‘순위 싸움’뿐이다. 야구는 현실을 반영한다. 지금 우리 삶이 그렇다. ‘결과에 승복하고 과정에는 침묵할 것.’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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