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제골을 넣은 뒤 박주영과 기성용이 정체 모를 세리머니 중이다 (사진=연합뉴스)
[풋볼리스트] 우리가 상대하는 팀이 중동 국가인지 착각할 정도였다. 스위스는 이노센트 에메가라의 동점골 외에는 이렇다 할 위협적인 장면을 연출하지 못했다. 그들이 경기 내내 연출한 것은 팔꿈치를 휘두르고, 헐리웃 액션을 취하고, 그라운드에 누워 시간을 끄는 파렴치한 장면들이었다. 그 절정은 후반 25분이었다 스위스의 풀백 미첼 모르가넬라가 갑자기 그라운드에 쓰러졌다. 박주영이 그를 스쳐 지나갔지만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그라운드 위를 뒹구는 모르가넬라의 연기에 주심은 박주영에게 경고 카드를 꺼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박주영이 장풍이라도 습득한 것일까?
결국 대한민국은 멕시코전과는 달리 스위스전에서 경기 내용도 압도하고 결과도 가져왔다. 두번의 골 장면은 멕시코전에서 아쉬웠던 과감하고 빠른 판단에 의한 득점이었다. 특히 공격진인 박주영, 김보경, 남태희가 모두 공격포인트를 기록했다.
#1 카사미, 네가 에이스 킬러냐?
기성용은 경기 시작 12초 만에 그라운드 위에 쓰러져야 했다. 경기 초반 우리의 적극적인 압박에 놀란 스위스는 목적 없는 긴 패스를 했고 하프라인 부근에서 공중볼 싸움을 위해 솟아 오른 기성용의 얼굴을 스위스의 미드필더 파이팀 카사미가 왼팔꿈치로 가격한 것. 이름처럼 파이팅 기질이 넘치는 에이스킬러 카사미는 그 즉시 퇴장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 하지만 주심은 경기 초반이라는 점을 의식했는지 경고를 꺼내는 데 그쳤다. 다른 스위스 선수들이 달려와 엄살이 아니냐며 항의하자 박주영을 비롯한 우리 선수들이 그들을 거세게 밀어내며 기성용을 보호하고 나섰다. 결국 그라운드 밖에서 의무진의 치료를 받고 돌아와야 했던 기성용의 오른쪽 눈 옆과 광대뼈는 멍이 든 상태였다. 중계를 지켜 보던 기성용의 팬들은 SNS에서 소스라치며 곧바로 영국행 비행기를 수소문하기 바빴다는 후문. 스위스가 이날 경기 내내 보여준 더티한 플레이의 출발을 알린 장면이었다.
#2 스위스 수비를 얼려버린 구자철의 킬러 패스
축구에서 정확한 타이밍의 패스와 그것을 받기 위한 선수의 움직임은 다수의 상대 수비수를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 전반 37분 나온 구자철의 기가 막힌 패스가 그것을 보여줬다. 역습 상황에서 공을 전달받은 구자철은 하프라인 지점에서 상대 진영의 상황을 살피며 움직였다. 이미 스위스의 포백 수비라인이 형성된 상황. 측면에서 돌아 들어오는 박주영의 움직임을 체크한 구자철은 양 측면 수비가 간격을 좁히고 센터백들이 전진하기 전의 완벽한 타이밍에 스위스 수비라인 뒷공간으로 움직이는 박주영을 향해 패스를 찔러 넣었다. 스위스의 수비라인을 완전히 허물어버린 킬러 패스였다. 뒤늦게 달려간 스위스의 수비수 파비앙 샤가 걷어낸다는 것이 오히려 박주영의 발을 맞으며 스위스 골문으로 향했다. 디에고 베날리오 골키퍼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막지 않았다면 한국의 선제골은 더 빨리 터질 수 있었다.
#3 믿음의 골 하나, 박주영의 완벽한 다이빙 헤딩슛
멕시코전이 끝난 뒤 박주영의 대한 평가는 분분했다. 올림픽대표팀의 공격 전개 방식이 지나치게 박주영이 상대 수비와 경합하게 만들었고, 2선에서의 지원이 활발하지 않아 고립됐다는 옹호론. 반대로 박주영의 컨디션과 경기 감각이 확실히 올라오지 못했다는 냉철한 비판론. 하지만 홍명보 감독은 묵묵히 믿음을 보냈고 박주영은 그라운드 위에서 그 믿음에 답했다. 후반 12분 남태희가 오른쪽에서 돌파해 수비 뒷공간으로 휘어 나오는 기막힌 크로스를 올렸고, 스위스 수비를 따돌리고 쇄도한 박주영은 다이빙 헤딩 슛으로 선제골을 터트렸다. 2005년 U-20 월드컵,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잇달아 스위스에 좌절했던 기억마저 날린 박주영이었다.
#4 믿음의 골 둘, 김보경의 환상적인 왼발 발리슛
김보경 또한 멕시코전이 끝나고 박주영 못지 않은 비판을 받았던 선수였다. 최근 잉글랜드의 2부 리그인 챔피언십의 카디프시티로의 이적이 확정된 김보경이지만 멕시코전, 그리고 스위스전 전반의 경기 내용은 올림픽 예선이나 지난 6월 월드컵 예선에서 보여준 놀라운 활약과는 거리가 있었다. 전반전에 박주영, 구자철의 콤비 플레이가 빛났지만 측면에서 김보경의 원활한 지원이 이뤄지지 않으며 득점에 가까운 찬스를 많이 만들지 못했다. 후반 들어서도 움직임이 경쾌하지 못하던 김보경은 1-1 동점 상황이던 후반 19분 자신의 재능을 뽐냈다. 구자철의 크로스가 스위스 수비를 맞고 굴절되자 낙하지점을 정확히 찾고 본능적으로 왼발을 들어 발리슛으로 연결했다. 반대편 골대 안으로 날아가는 완벽한 골이었다. 득점 후 김보경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동료들을 뿌리치고 홍명보 감독에게 달려갔다. 자신에게 변함 없는 믿음을 준 이에 대한 분명한 보답이었다.
# 서형욱의 선택, 그 장면ㅣ박주영의 장풍, 스위스 멘탈 붕괴의 증거
후반 25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박주영 옆에서 얼쩡거리던 스위스 수비수 모르가넬라가 갑자기 혼자 나동그라진 것이다. 그러자 주심은 어리둥절한 표정의 박주영에게로 다가가 노란색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억울한 박주영은 황당했지만, 단호하게 카드를 빼 든 주심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때다 싶어 아카데미 남우단역상급 호연을 펼친 모르가넬라의 사기에 말려든 것이다. 에이스 박주영이 옐로 카드를 받은 것은 아쉬운 대목이지만, 모르가넬라가 허공에 손을 내저으며 쓰러진 이 장면은 경기의 분수령이나 마찬가지였다. 빠른 동점골에도 불구하고 곧장 김보경에게 추가골을 내준 스위스는 경기 내내 열세를 면치 못한 신세와 맞물려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정면 승부로는 활로를 찾기 힘든 그들은, 이때부터 서서히 꼼수를 노리기 시작했다. 스위스 멘탈 붕괴의 시작이 된 이 명장면은, 그래서 대한민국이 승리를 장담할 수 있게 한 이 날의 결정적 순간이었다.
# 서호정의 선택, 그 장면ㅣ엄친아 기성용, 못하는 게 뭐니?
기성용의 투혼은 눈부셨다. 경기 초반 눈 옆과 아래가 부어 오른 상황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풀타임을 소화했다. 박종우와 함께 전체 경기를 조율했고 예의 날카로운 킥과 중거리슛을 구사했다. 경기 종료 후 교환한 스위스 유니폼을 입은 기성용은 현지 방송사와 인터뷰를 가졌다. 광대뼈에 커다란 밴드를 붙인 채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 기성용은 얼굴을 다쳤음에도 금새 자기 플레이를 할 수 있었던 힘, 그리고 멕시코전 무승부 이후 팀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준비했는지를 아주, 잘 설명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호주로 유학을 떠나 5년간 생활하며 터득한 영어는 기성용의 선수 생활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셀틱에서의 빠른 적응에도 영어가 한 몫 했다. 감독, 동료들과 적극적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얼굴도 잘 생기고, 축구도 잘 하고, 키고 훤칠하고, 영어도 잘하는 기성용 너 참 부럽다!
결승골을 기록한 뒤 홍명보 감독을 비롯한 팀원들에게 달려가는 김보경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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