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LG 입단 당시의 김재현(사진=LG) |
7위다. 34승 2무 44패. 1위와 12경기 차다. 8위와도 4.5경기 차. 올 시즌 LG의 성적이다.
2002년 이후 LG는 가을과 인연이 없었다. 강산이 변하고, 대통령이 세 번 바뀌었지만, LG의 포스트 시즌 진출은 아직도 요원하다. 하지만, 1990년대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LG는 강자 가운데 강자였다. 한국시리즈 우승 2회, 준우승 2회를 경험했다. 특히나 1994년은 LG의 전성기였다. 그해 LG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LG의 기적은 ‘예고된 기적’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18승으로 다승왕에 오른 이상훈을 비롯해 김태원(16승), 정삼흠(15승), 인현배(10승) 등 4명의 선발 투수가 두자릿수 승리를 챙겼고, 마무리 투수 김용수는 5승 5패 30세이브로 뒷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강봉수, 차동철, 차명석 등은 그런 김용수를 도와 철벽 불펜진을 형성했고, 타선에선 한대화, 노찬엽 등 베테랑이 해결사 역할을 담당했다. 무엇보다 ‘신인 3총사’의 힘이 컸다.
1994년 나란히 LG 유니폼을 입은 유지현, 김재현, 서용빈 등 신인 3총사는 출중한 실력과 매력적인 외모로 전국 야구장에 팬을 몰고 다녔다. 공·수·주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펼친 유지현은 신인왕에 올랐고, ‘무명’이었던 서용빈은 신인 최초 사이클링히트에 신인 최다 안타(157)를 기록하며 타율 3할1푼8리를 기록했다. 그리고 김재현이 있었다.
서울 신일고를 졸업하자마자 프로에 입문한 19살 김재현은 신인 최초로 20-20클럽(21홈런-21도루)에 가입했고, 당대 대투수 해태 조계현의 공을 받아쳐 잠실구장 백스크린을 맞히는 비거리 145m의 홈런을 때려냈다. 지금 야구선수들이 연예인 이상의 대접을 받고, 많은 팬을 보유한 건 18년 전 김재현이 등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신바람 야구’는 이제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90년대 강자’ LG도, 신인 3총사도 이젠 빛바랜 사진 속에서나 만날 수 있다. 그러나 LG를 사랑하고, 1990년대 야구를 그리워하는 이들은 여전히 LG의 ‘신바람 야구’를 기억한다.
LG팬 권호성 씨는 말한다. “1994년 그놈의 신바람 야구에 매료돼서 지금까지 LG를 응원하고 있다”고. LG의 부진에 가슴 아파하고, 때론 분노하면서도 잠실야구장을 찾으면 ‘LG 없으면 못 산다’고 외치는 그들에게 1994년은 추억을 넘어 영광의 한 페이지이자, 다시 도래해야 할 전설이다.
‘신인 3총사’ 가운데 마지막으로 현역 유니폼을 벗은 김재현은 그래서 더 의미가 각별하다. 유지현, 서용빈은 LG 유니폼을 벗고, 친정팀에서 코치로 뛰지만, 김재현은 SK에서 은퇴했다. 어쩌면 김재현이 SK에서 은퇴했기에 그의 전설이 더 확장된 것일지 모른다. 이제 김재현은 LG뿐만 아니라 SK의 레전드이기도 하다.
김재현은 2010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고서 2011년 LA 다저스 산하 싱글A팀 인랜드 엠파이어에서 지도자 연수를 마쳤다. 그리고 올 시즌엔 “선진야구를 더 접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일본행을 선택했다. 그는 현재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2군 타격코치를 맡고 있다.
<스포츠춘추>는 현역시절 그를 인터뷰하고자 몇 번이나 시도했다. 하지만, 매번 돌아오는 대답은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고, 이윽고 때를 잡았다. 인터뷰는 밀크커피처럼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여름, 일본 도쿄에서 진행됐다.
전 SK 외야수 김재현이 요미우리 2군 훈련장 앞에 서 있다. 그는 요미우리 2군에서 가장 정열적이고 성실한 코치로 꼽히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미안한 듯 얼굴을 붉히며) 죄송합니다. 사실 제가 예전부터 인터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말 잘하는 야구인이 인터뷰를 좋아하지 않았다라, 의외인데요.
왜 이러세요(웃음). 음, 인터뷰를 하다 보면 나 자신이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자꾸 하게 되더라고요. 해설가분도 그렇고, 리포터 분들도 그렇고 자꾸 전망이나 예상을 물어보시잖아요. 시청자분들은 그런 이야길 듣는 걸 좋아하시겠지만, 이상하게 전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자꾸 하는 것 같아 ‘영’ 그렇더라고요. 물론 선수와 기자가 상부상조하는 게 맞긴 하지만, 서로 예의를 지키는데 능숙하지 못한 분들도 더로 계셨고. 어쨌거나 신인 때부터 인터뷰를 잘 안 했는데, 오늘 기회가 생겼네요(웃음).
저도 인터뷰 준비하려고 자료를 죄다 찾아봤는데, 김 코치님이 장문의 인터뷰를 한 걸 발견하지 못했어요. 아무쪼록 오늘 인터뷰 잘 부탁합니다.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먼 곳까지 찾아오셔서 고맙습니다. 네이버 독자분들과 만나서 정말 반갑기도 하고요. 오히려 제가 잘 부탁합니다.
독자(獨子), 야구 천재로 거듭나다. 신일중 시절 김재현(사진 맨 왼쪽), 조인성의 얼굴도 보인다(사진 맨 오른쪽)(사진=김재현)
“김재현은 천재 타자였다. 신일중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은퇴할 때까지 줄곧 천재였다.”
- 신일중 은사, 롯데 자이언츠 양승호 감독 -
손이 귀한 집 아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얼핏 몇 대 독자(獨子)라고 들었는데요. 대개 손이 귀한 집에선 아들이 태어나면 운동을 잘 시키지 않더군요.
독자 맞아요. 몇 대 독자인지 아세요?
글쎄요. 3대 독자 정도 되지 않을까요?
(고개를 흔들며) 아니에요.
그럼 4대?
(빙그레 웃으며) 7대 독자에요.
(눈이 커지며) 7대 독자요?
네, 당연히 운동할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할아버지께서 원체 교육열이 높으셔서 운동은 꿈도 꾸기 어려웠죠.
그런데 야구는 어떻게 하다가 시작한 겁니까.
실은 부모님께서 절 사립초교로 보내려고 하셨거든요. 순전히 사립초교에 가려고 야구를 시작한 거였어요.
사립초교를 가려고 야구를 시작했다?
제가 전학하려던 서울 성동초교가 사립초교였어요. 그 학교에 야구부가 있었어요. 야구부에 들어가야지만 전학이 가능했어요. 그래 솔직히 성동초교에 전학하려고 5학년 때 야구부에 들었어요. 그런데 직접 야구를 해보니까 재밌더라고요. 완전히 야구 재미에 매료된 거죠. 부모님께선 빨리 애가 야구를 그만둬야 하는데 계속하니까 답답하셨나 봐요. “이제 됐으니까 그만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래, 그만뒀습니까.
아니요. 그때부터 단식투쟁하고, 방에서 안 나왔어요(웃음).
자식 이기는 부모, 많지 않아요.
결국엔 부모님께서 “하는 데까지 해봐라”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시작한 야구가 지금까지 오게 됐네요(웃음).
집안이 꽤 유복했다고 압니다만.
그렇게 부자는 아니었어요. 아버지가 사업하셨어요. 그냥 중산층이었어요.
할아버지께서도 7개 독자가 야구하는 걸 허락하셨습니까.
(할아버지께선) 심하게 반대하셨어요. 그래도 제가 “열심히 하겠다”고 하니까 믿고 봐주셨어요. 어떻게 보면 야구와는 참 인연이 있던 것 같아요. 초·중·고 때 그렇게 많이 맞으면서도 야구가 늘 재밌더라고요. 성동초교 후배로는 나주환(SK)이 있습니다. 저와는 나이 차가 꽤 나지만요.
성동초교 졸업 후, 서울 신일중으로 진학했습니다.
부모님께선 내심 제가 배재고, 경기고, 휘문고, 서울고 등 명문고에 진학하길 바라셨어요. 그래서 강남에 있는 중학교에 가길 바라셨죠. 하지만, 전 야구 제일 잘하는 중학교에 가고 싶었어요. 그래 신일중에 가게 됐습니다.
신일중에 입학하고, 그해 신일중이 전국대회를 휩쓸었습니다. 조인성(SK)이 신일중 동기지요?
(조)인성이가 동기, 조현이 한해 밑이었죠. 그때 감독님이 지금 롯데 사령탑이신 양승호 감독님이셨어요. 프로 출신이란 이유로 그때는 벤치에서 직접 사인을 못 내셨어요. 관중석에서 사인을 내시면 야구부장님이 그 사인을 받아서 우리한테 전달해주셨죠. 지금 생각하면 우리끼리 알아서 야구한 것 같아요(웃음). 그래도 당시 신일중이 36연승을 거뒀을 겁니다. 대단했죠.
36연승은 어쩌다 중단된 겁니까.
부산에서 주형광이 뛰던 초량중학교(현 부산중학교)랑 붙었는데, 1대 2로 졌어요.
주형광이 호투한 모양이군요.
그랬으면 아쉬움이라도 없죠. 정말 말도 안 되게 졌어요.
실책으로 진 건가요?
아니요. 심판분이 정말 어거지를 쓰셨어요. (주)형광이가 던지면 다 스트라이크였어요. 홈으로 들어오는 주자를 여유있게 아웃시켜서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심판분이 “세이프!”하고 외치시더군요. 속으로 ‘아, 야구를 이렇게 할 수도 있구나’ 했다니까요(웃음).
당시 기록을 살펴보니까 중학교 1학년 땐 투수도 했던데요. 요미우리 선수들을 상대로 배팅볼 던지는 장면을 보니까 투수로 성장했어도 대성했을 것 같던데요.
아, 왜 이러세요(웃음). 지금도 배팅볼 던지는데 제구가 안 돼서 죽겠어요. 사실 중학교 1학년 때 감독님께 ‘투수는 못하겠다’고 사정했어요. 공은 빨랐는데 그때도 제구가 안 돼서 스트라이크가 안 들어갔어요. 어쩌면 빨리 저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셈이죠. “야수만 전념하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야수만 전념하기 시작한 이후, 중학교 최고 거포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순간적으로 힘을 내는 건 중학교 때부터 좋았던 것 같아요. 지금 키가 중3 때 ‘딱’ 그 키에요. 그때는 체구가 큰 편이었죠.
양승호 감독님은 그때도 부드러운 지도자였나요.
그러셨죠. 부드러우셨어요. 하지만, 전 크게 혼난 기억이 있어요.
그래요?
목동구장에서 경기했는데, 제가 그날 삼진을 2개나 당했어요. 외야 수비도 좀 건성으로 했나 봐요. 경기는 이겼어도, 팀의 4번 타자라는 녀석이 자기 삼진 당했다고 인상을 쓰고 버스 뒤에 앉아 있으니 분위기가 얼마나 좋지 않았겠어요. 감독님이 버스에 타시자마자 “너, 인마. 앞으로 나와”하시더라고요. 앞으로 나가는데 (달리는 시늉을 하며) 감독님께서 벌써 뛰어오시면서 이단 옆차기를 날리시는 거예요. 제딴에는 그래도 무서운 선배였는데요. 그 무서운 선배가 후배들 앞에서 감독님한테 혼쭐이 나니 보는 사람이나 맞는 저나 얼마나 무안했는지 몰라요.
이런.
목동구장에서 신일중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계속 울었어요. 창피하고, 어린 마음에 분하기도 하고. 야구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울었던 때 같아요.
당시 일을 양 감독님도 기억하고 있을까요.
글쎄요. 모르겠어요. 솔직히 그때 전 제가 뭘 잘못한 지 잘 알고 있었어요. 제가 팀의 최선참이고, 중심이었는데,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됐어요. 당시는 뭐 맞으면서 배우던 시절이었으니까요(웃음).
고교 새내기, 막강 신일고 주전으로 뛰다. 1992년 김재현은 팀의 봉황대기대회 우승에 일조를 담당한다(사진=신일고)
“고교 시절 김재현은 1학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배트 스피드가 빨랐다. 속으로 ‘부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신일고 선배 설종진 넥센 매니저 -
신일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타자였습니다. 고교 진학 시 군침을 흘린 팀이 많았을지 싶습니다.
신일중 출신은 신일고로 자연스럽게 진학하는 게 관행이었어요. 저도 신일고를 좋아했고, 신일고에서도 절 놔줄 리 없었어요.
당시 신일고는 초고교급 선수들이 즐비한 팀이었습니다. 3학년엔 조성민, 설종진, 2학년엔 강혁, 백재호가 버티고 있었어요. 그런 팀에서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었어요.
처음엔 고3 선배들이 대학도 가야 하니까 제가 주전으로 뛸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대타로만 나갔어요. 그런데 대타로 나갈 때마다 안타를 치니까 계속 출전을 시켜주시더라고요. 그해 봉황기대회에서 우승하고, 제가 수훈선수상을 받았어요. 돌아보면 그때 (설)종진이 형은 만화로 치면 ‘독고탁’ 같은 사람이었어요. 못하는 게 없었어요.
설종진이 저와 동갑이라, 잘 압니다. 투수면 투수, 야수면 야수 못하는 게 없었지요.
제가 고1 때, (조)성민이 형이 위기면 종진이 형에 마운드에 오르고, 성민이 형이 외야로 갔어요. 그러다 종진이 형이 위기를 넘기면 다시 성민이 형이 마운드에 오르고, 종진이 형이 외야로 돌아갔어요. 종진이 형이 1번 타자였는데, 못 치면 내야안타, 잘 치면 홈런이었어요. 1루 가면 2, 3루 도루는 기본이었고요. 정말 야구의 신도 그런 신이 없었어요(웃음). 성민이 형은 고려대 가서 더 무시무시한 공을 던졌죠. 정말 두 선배 모두 대단했어요.
고1 때부터 그 유명한 ‘92학번’ 투수들과 상대했는데요. 혹시 기억에 남는 투수라도 있습니까. 가령 박찬호(한화)와의 승부라든가.
글쎄요. 제 기억이 맞다면, 그때만 해도 (박)찬호 형은 성민이 형이나 (임)선동이 형 레벨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공 빠른 투수로만 유명했죠. 그때도 아마 시속 145km 이상은 쉽게 던지셨을 거예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땐 차라리 박재홍(SK) 선배가 찬호 형보다 위였지 싶어요. (한손으로 수박만한 혹을 만드는 시늉을 하며) 재홍이 형이 던진 공에 맞으면 얼마나 공이 묵직한지 손이 이렇게 부었어요. 우리가 ‘돌공’이라고 부를 정도였어요.
맞아요. 광주일고 박재홍은 투수로도 유명했습니다.
제 생각에 당시 92학번 최고 투수는 1번이 선동이 형, 2번이 성민이 형, 3번이 경기고 손경수 선배나 경남상고(현 부경고) 차명주 선배, 재홍이 형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고교시절 기록 보면 휘문고 에이스 임선동의 공을 잘 친 것으로 나옵니다.
제가 생각해도 선동이 형 공을 잘 쳤어요. 고교 1학년 때 아마 3타수 2안타를 기록했을 거예요.
고3 선배들이 졸업해도, 신일고의 전성시대는 계속 이어집니다. 물론 그 중심엔 김재현이 있었습니다.
제가 고3일 때 멤버가 좋았어요. (조)인성이가 포수, 고려대 간 김형기, 나중에 해태에 입단했던 엄병렬이 마운드에 버티고 있었어요. 2학년엔 조현이 있었고요. 그해 대붕기와 황금사자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죠.
고교시절 동기 조인성은 어땠습니까.
당시 인성이는 참 착한 친구였어요. 열심히 하고. 그런데 체구가 크고, 좀 느렸어요. 멀리서 보면 미쉘린 타이어 마스코트가 걸어오는 것 같았어요. 살이 토실토실했거든요. 그래도 지금까지 야구하는 거 보면 참 성실한 친구란 생각이에요(웃음). 인성이는 좋아하는 야구, 오래 했으면 좋겠어요.
1993년 9월 21일 동아일보 기사 |
‘최동원에게 선동열이 없었다면, 김봉연에게 이만수가 없었다면, 양준혁에게 이종범이 없었다면’ 과연 야구의 재미가 지금처럼 풍성했을까 싶습니다. 그만큼 라이벌이 갖는 의미는 각별합니다. 당사자야 주변의 시선이 힘들겠지만, 팬과 언론 입장에선 라이벌만큼 재미난 구도도 없는 게 사실입니다. 김 코치도 신일고 시절, 영원한 라이벌을 만나는데요. 바로 배명고 4번 타자 김동주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우리 둘을 ‘좌(左)재현, 우(右)동주’라고 불렀어요. (김)동주는 고1 때부터 4번을 쳤어요. 전 그때 쟁쟁한 선배들 때문에 4번은 고사하고, 출전도 제대로 하기 힘들었는데요(웃음). 지금 생각하면 고3 때 제가 홈런, 도루왕을 차지하면 동주가 타점왕을 먹고, 제가 타점왕에 오르면 동주가 홈런왕에 오르고 했던 것 같아요. 동주가 있던 배명고는 제가 고3 때는 전력이 약해서 전국대회 우승은 못했어요. 솔직히 동주가 장타력 면에선 (저보다) 좋았던 것 같아요.
고교시절 라이벌 의식이 대단했을 듯싶습니다.
라이벌 의식이요? 솔직히 그런 건 없었어요. 대표팀도 함께 한 적이 없었어요.
그래요? 의외인데요.
동주와는 대표팀에서 함께 뛴 기억이 없어요. 고3 때 동주는 대표팀 멤버가 아니었어요. 당시 배명고가 약한 탓도 있었을 거예요. 어쨌거나 고3 때 출전한 한일고교야구친선대회에서도 동주는 없었어요.
나이 차가 좀 있지요?
제가 원래 1974년생이에요. 동주는 빠른 76년생이고. 실질적으론 두 살 차이죠.
김 코치의 정식 프로필엔 1975년 10월 2일로 돼 있었습니다.
초교 3학년 때 1년 쉬었어요. 그때 몸이 약했거든요. 햇빛만 봐도 코피를 흘릴 정도였어요. 할아버지께서 “1년 쉬고, 학교에 다니라”고 하셔서 쉬었습니다. 그때 몸보신 한다고 초교생이 뱀도 먹고 그랬다니까요(웃음).
연세대 가계약, 그러나 전격적인 프로행 1993년 11월 일본 오키나와에서 열린 한일고교야구친선대회에 참가한 김재현. 그는 오키나와에서 전격적으로 LG와 계약했다(사진=김재현)
“한국청소년대표팀이 중심타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경기마다 홈런을 ‘펑펑’ 때렸다. 일본 프로야구 신인드래프트에 나와도 당장 1순위감으로 보였다.”
- 일본고교야구연맹 다나베 가즈히로 상임이사 -
1993년 11월에 열린 한일고교야구친선대회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왜 기억하느냐 하면 당시 친구와 버스를 타고 가는데, 스포츠뉴스에서 신일고 김재현이 3경기 연속 홈런을 치면서 일본 대표팀을 녹아웃시켰다는 소식을 들려줬어요. 당시 그 뉴슬르 듣던 친구가 김 코치를 “초고교급 좌타자”라고 하더군요. 정말 ‘녹아웃’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일본고교팀을 초토화했습니다.
그때 무슨 이유로 한국이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지 않았어요. 일본 전역을 돌면서 일본 고교연합팀과 경기를 가졌어요. 그때 우리가 6전 6승을 거둔 걸로 아는데요. 그때 3경기가 아니라 4경기 홈런을 쳤나 아마 그랬을 거예요. 당시 일본대표팀 4번 타자가 지금 요미우리에서 뛰는 다카하시 요시노부였어요. 그때 우리 대표팀 투수가 이호준(SK), 김경태(SK 코치), 포수가 조인성, 신경현(한화), 내야수가 채종국, 외야수가 저랑 손인호, 조현이었어요. 멤버가 참 좋았죠.
그때 LG팬이었던 친구가 한 말이 지금도 기억에 선합니다. “이런 선수가 LG에 와야 하는데, 대학에 진학한다”며 무척 아쉬워했었어요. 헌데, 정작 고교 졸업하고 김 코치가 간 곳은 대학이 아니라 LG였습니다.
많은 야구인이 제가 연세대에 진학하리라 예상하셨어요. 사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제가 연세대에 입학하길 바라셨어요.
아버지가 연세대 출신이신가요?
아니요. 과거 아버지께서 연세대 상대를 치셨는데 떨어지셨대요. 그게 아쉬움이셨는지 제가 어렸을 때부터 “너는 꼭 연세대에 가야 한다”고 주입을 시키셨어요. 조건은 고려대가 좋았지만, 연세대와 가계약한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LG행으로 진로를 수정한 이유는 뭐였습니까.
한일고교친선대회를 일본 본토에서 치르고, 오키나와로 넘어갔어요. 거기서 오키나와 고교선발팀과 경기하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4경기 연속 홈런을 쳤다는 소식을 LG도 유심히 들었던 것 같아요. 오키나와로 LG 관계자가 찾아오셨습니다.
한국청소년대표팀이 머물던 오키나와까지요? 대한야구협회 관계자들이 눈치를 못 챘나요?
(고개를 끄덕이며) 제가 숙소에서 몰래 탈출했어요(웃음). 그때 부모님도 오키나와로 오셨거든요. LG 관계자분 만나서 정식으로 계약서에 사인했어요. 아, 그런데 극비리에 진행한 LG 계약이 다음날 다 알려졌지 뭐에요.
협회에서 눈치를 챈 모양이군요.
협회가 아니라 일본고교야구연맹이 더 빨리 알았어요. 계약하고 다음날 일본고교야구연맹 관계자가 우리 쪽에 찾아와서 난리를 폈어요.
왜요?
“일본은 프로팀과 계약한 시점부터 해당 선수를 프로선수로 취급한다. 그런데 당신네 팀 김재현이 어제 프로팀과 계약했다. 그렇다면 김재현은 아마추어선수가 아니라 이제 프로선수다. 어떻게 고교대회에 프로선수가 나올 수 있느냐”며 노발대발했어요. “남은 경기에 뛰지 마라”고 하더군요.
어떻게 알았을까요?
지금도 그걸 모르겠어요. 어쨌거나 그날 제 계약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연세대 김충남 감독님 전화가 왔어요.
뭐라고 하던가요.
“재현아, 아니지?”하시더군요.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드릴 말씀이 없잖아요. “죄송합니다”했죠.
가만히 듣고만 있던가요.
“아니다. 내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재현아. 지금이라도 번복할 수 있다.”(웃음).
연세대와의 가계약을 떠올리면 참 난감했겠습니다.
그랬죠. 그래도 “감독님, 저 프로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했어요. 그렇게 말씀드리고 나니까 감독님께서 말씀이 없으시더군요.
당시는 대학에서도 프로 못지 않은 거액의 스카우트비를 줄 때였습니다. 동기생 몇 명 데리고 입학하면 1억 원 이상이 스카우트비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요. 어째서 프로로 유턴한 겁니까.
사실 저는 데려갈 친구도 없었어요. 동기생들이 다 잘했거든요. 그런 걸 떠나서 막판에 프로에 매료된 게 컸어요.
프로에 매료?
고3 때 한 번은 당시 LG 유지홍 스카우트께서 집에 찾아오셨어요. “잠실구장에 가자”고 하시더라고요. 그땐 프로 생각이 없었던 때라, 전 정말 가기 싫어했어요. 그런데도 스카우트님이 계속 “한 번만 가자”고 계속 설득하시는 거예요. 그래 마지 못해 잠실구장에 따라갔어요.
물론 잠실구장에선 LG경기가 열리고 있었겠군요.
LG와 해태의 더블헤더가 열리고 있었어요. 그때 LG-해태전은 대단한 라이벌전이었거든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데 그때 LG 선발이 김태원 선배, 해태 선발이 조계현 선배였어요. 당대 최고 투수들이 맞붙은 경기였죠.
2002년 이후 LG 성적이 좋지 않다 보니까 어린 야구팬들이야 모르지, 1990년대만 해도 LG-해태전은 정말 최고의 라이벌전이었어요. 저도 당시 잠실구장을 집처럼 드나들곤 했습니다.
당시 더블헤더 1차전에서 해태가 1대 0으로 이겼어요. 2차전에서 LG가 이긴 걸로 기억나는데요. 2차전에서 박종호 선배가 5타수 4안타인가 쳤어요. 이종열 선배도 무척 잘했고, 이우수 선배도 백업요원으로 뛰었어요. 솔직히 (박)종호 형은 고교 시절 그렇게 유명한 선배는 아니었거든요. 종열이 형이나 우수 형도 그랬고요. 그런데 프로에 와서 저렇게 잘하는 걸 보니 이상하게 자신감 같은 게 생기기 시작했어요.
서서히 자신감 같은 게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프로에 가면 저 형들보다 잘하진 못해도, 못할 것 같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차피 프로에서 뛰려고 지금까지 야구한 건데, 굳이 대학에 가야하나’ 싶었고요. 그때부터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다가 결국 프로행을 결심하게 됐어요.
연세대행을 바라던 부모님은 어떻게 설득했습니까.
집에선 “연세대로 진학하라”고 하셨죠. 그러다 제가 고집을 피우니까 “후회해도 네가 하는 거다”하시면서 선택권을 제게 주셨어요. 거기다 LG가 내세운 조건도 나쁘지 않았고요.
어떤 조건이었습니까.
계약금 9천100만 원에 연봉 1천200만 원이었어요. 총액 1억300만 원이었죠.
그 정도면 고졸 선수로는 특급대우였습니다.
재미난 게 제가 1억300만 원을 받으니까 다른 선수들 몸값도 껑충 뛰었어요. 충암고 졸업반 신윤호는 원래 총액 9천만 원이었는데 1억 원으로 올라갔고요. 롯데에 입단한 주형광은 원래 1억 원인가 받기로 했는데, 제 계약소식이 알려지자마자 1억400만 원으로 발표됐어요(웃음). 하지만, 그 친구들이 모르는 게 있었어요.
그게 뭔가요?
전 발표만 1억300만 원이었지, 1억5천만 원을 받기로 했거든요(웃음). 거기다 조건이 하나 더 있었어요.
조건은 또 뭐였습니까.
만약 김동주가 OB(두산의 전신)와 3억 원에 계약하면 전 3억1천만 원을 받는다는 조건이었어요.
이면계약이 있었던 거군요.
그렇죠. 동주가 고려대에 입학하기로 했는데, 나중에 OB에서 3억 원까지 부른 모양이에요. 듣기론 동주도 프로행으로 마음을 덜렸다고 하고. 속으로 ‘동주야, 제발 OB 가라. 빨리 서울을 튀어라’라고 기도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웃음).
당시 대학팀에선 고교 졸업생들이 프로와 계약할까 봐, 프로계약기간에 선수들을 납치(?)하곤 했습니다.
동주도 그랬어요. 고려대 조두복 감독님이 동주 데리고 무인도에 갔죠(웃음). 전 운좋게 무인도 가기 전에 LG와 계약했고. 사실 많은 분이 제가 대학에 가고, 동주가 프로에 갈 거라고 예상했는데 완전 반대가 됐죠.
당시 연세대도 선수들을 몇 명 데리고 잠적했었지요?
연세대 선배들이 조인성, 이호준, 채종국 이 친구들을 데리고 호텔로 갔나 봐요. 그때 선배들이 가만히 놔두면 애들이 도망갈까 봐 짓궂게 폭탄주를 먹였나 봐요. 술에 취해 다 곯아떨어져 있는데, 그걸 이기고 도망간 친구가 바로 이호준이란 이야기 아닙니까(웃음).
그 길로 해태와 계약했지요.
아마 호준이가 계약금으로 8천만 원(주 : 공식 계약금 5천만 원) 받았을 거예요. 그때 호준이는 꽤 좋은 투수였어요. 연세대를 뿌리치고, 청운의 꿈을 품고 해태까지 갔는데 (잠시 침묵하다가) 저 때문에 인생이 바뀌고 말았죠.
둘 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프로 첫해였던 1994년 제가 ‘20(홈런)-20(도루)’을 기록할 때 20호째 홈런을 이호준을 상대로 때렸어요.
아, 그랬지요. 당시 이호준은 해태 투수였습니다. 꽤 기대를 모았던 우완투수였는데 데뷔 첫해 12⅓이닝을 던지고선 더는 마운드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홈런 치기 전날, 호준이랑 만나서 식사하고, 가볍게 맥주를 마셨어요. 이런저런 이야기 하다가 농담으로 “호준아, 좋은 공 하나만 던져주라”고 했어요. 자기도 농담으로 “내 코가 석자다”하더라고요. 마침 다음날 호준이가 마운드에 올라왔는데, 첫 타자 유지현 선배한테 홈런을 맞은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호준이 입장에선 오랜만에 마운드에 올랐는데 얼마나 마음이 안 좋았겠어요. 친구로서 참 착잡하더군요.
그런 친구를 상대로 홈런을 치지 않았습니까.
어쩌겠어요. 그게 야구인데(웃음). 지현이 형한테 홈런 맞자마자 다음 타자였던 저한테도 홈런 맞으면서 백투백 홈런을 허용했지 뭐에요. 마운드에서 내려갔을 때 해태 김응룡 감독님이 호준이를 부르면서 물으시더래요.
뭐라고요?
“너 먹고 살 거 있냐?”라고요. 호준이가 큰소리로 “없습니다!”하니까 “야 인마, 여기서 당장 사라져. 어여”하시더래요(웃음). 그날 이후 호준이는 타자로 전향했어요. 만약 지금까지 투수를 계속했으면 진작에 은퇴했을 거예요. 그래도 저 때문에 타자 전향하고, 성공했는데. 솔직히 호준이가 받는 FA 총액 중에 3분의 1은 제가 받아야 해요. 아,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지금껏 술 한잔을 안 사네요(웃음).
1994년 ‘신인 3총사’, LG 전성기를 열다. 1993년 11월 LG 입단 당시의 김재현(사진=LG)
“스프링캠프에서 김재현을 보고 ‘안 되겠다’ 싶었다. 선수로서 안 되겠다? 그게 아니라 ‘하도 기특하게 잘해서 쟤만 편애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 전 LG 감독, 이광환 베이스볼아카데미 원장 -
1994년 신인 김재현에 주목한 야구전문가는 많았습니다. ‘제2의 장효조’란 별명을 붙이며 큰 기대감을 나타냈습니다. 하지만, 일본 오키나와 스프링캠프 초반까진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프로 입단할 땐 자신감이 넘쳤어요. 그런데 막상 프로 유니폼을 입고 선배들이랑 뛰니까 ‘왜 프로가 프로인가’알겠더라고요. 알루미늄 배트와 나무 배트의 차이도 ‘확’ 느껴지고. 체력적으로 힘들었어요. 거기다 부상도 있었고요. 덩달아 자신감도 잃어갔죠.
터닝포인트가 있었을 듯싶은데요.
오키나와에서 주니치 드래건스와 연습경기를 치렀어요. 그때 주니치 투수가 마무리 곽원치(가쿠 겐지)였어요. 그 투수를 상대로 안타를 치면서 활약을 괜찮게 했어요. 잃어버렸던 자신감도 찾고, 몸도 좋아지니까 프로에 적응되더군요.
그해 시범경기에선 시쳇말로 날아다녔습니다.
스프링캠프까지만 해도 “쟨 안 돼”라고 평가받았는데, 시범경기에서 운이 좋았어요. 시범경기에서 타율 3할에 홈런도 치면서 눈도장을 찍었죠. (서)용빈이 형도 저와 입장이 비슷했어요. 아시다시피 원래 용빈이 형이 주전 1루수가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허문회 선배가 김상훈 선배가 해태로 가고 공백이던 주전 1루수를 맡을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허 선배가 시범경기에서 부진하고, 용빈이 형은 출전할 때마다 안타를 치면서 처지가 바뀌었죠. 나중에 용빈이 형이 사이클링 히트 치고 완전히 주전 1루수로 무혈입성했죠.
1994년 신인 김재현의 미래를 밝게 전망하는 야구전문가는 많았지만, LG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리라 예상한 전문가는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돌이켜볼 때 그해 LG 우승의 원동력은 무엇이었다고 봅니까.
그 당시 표현대로라면 ‘아다리’가 잘 맞았어요. 김상훈 선배님을 해태로 트레이드해하고 해태에서 한대화 선배님을 영입했는데 한 선배님이 정말 잘해주셨어요. 생각지도 못한 신인 3인도 잘했고, 투수진에선 (인)현배 형이 잘해줬어요. 정말 퍼즐 조각처럼 팀이 ‘딱딱’ 잘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기억을 더듬으며) 1번 타자 (유)지현이 형이 3할 치고 도루 50개 이상 했죠. 제가 2번 치면서 타격부문 10위 안에 다 들었죠. 3번 용빈이 형이 타율 3할 이상에 70타점 이상 기록했죠. 4, 5번 치시던 한대화, 노찬엽 선배님이 주자가 나가면 전부 불러들였죠. 지금도 기억에 선해요. 지현이 형이 출루하고, 제가 안타 쳐서 1, 3루면 용빈이 형 아니면 한대화 선배가 꼭 적시타로 타점을 올렸어요. 진짜 기가 막히게 득점공식이 맞아 떨어졌어요.
당시 LG 팀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그때 노찬엽 선배가 주장이셨는데, 정말 멋있게 팀을 이끌어주셨어요. 스프링캠프 때만 해도 방을 대선배님들과 함께 썼어요. 저도 캠프 때 김태원 선배와 같은 방을 썼는데요. 그때는 선배가 돌아올 때까지 침대 위에 눕는 건 상상도 못했어요(웃음). 저와 신윤호가 선배들 속옷이고, 양말까지 다 빨아서 침대 위에 ‘딱’ 갖다놓곤 했어요. 그런데 정규 시즌이 시작하니까 노찬협 선배님이 비슷한 나이 때로 룸메이트를 정해주셨어요.
시즌 땐 누가 룸메이트였습니까.
전 용빈이 형이었어요. 별거 아닌 것 같지만, 후배로서 그런 배려가 정말 고맙거든요. 노 선배님은 후배들을 굉장히 편하게 해준 분이었어요. 물론 엄할 때 엄하셨지만, 대부분 후배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팀을 이끌어주셨어요. 지금도 그 점은 감사하게 생각해요.
프로 첫해, 정말 어마어마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고졸 신인임에도 타율 2할8푼9리, 21홈런, 80타점, 21도루를 기록하며 타격 전부문 상위권에 이름을 올립니다.
그때는 두산, 해태와 경기하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어요. 관중도 많이 오셨고요. 두산 김상진(SK 코치)선배와 우리 이상훈 선배가 나오면 늘 2대 0, 1대 0 승부였어요. 해태 조계현 선배와 우리 김태원 선배가 나올 때도 팽팽한 투수전이었고요.
그 대투수 조계현을 상대로 잠실구장에서 비거리 145m의 대형홈런을 뽑아냈습니다.
그러네요. 대투수 조계현 선배의 공을 19살 짜리 신인이 받아쳐서 잠실구장 백스크린을 맞췄으니 난리가 날 법도 했죠. 일전에 (임)창용이를 만났는데 창용이도 그러더라고요. “그때 형이 홈런친 거 보고 깜작 놀랐다”고(웃음). 그땐 해태 선동열 선배 공도 풀스윙으로 돌렸어요. 왜냐? 밑져야 본전이니까. 우리나라 최고 투수인데, 못 치는 게 당연한 거였어요. 돌아보면 어렸을 때 그랬던 것 같아요. 못 치더라도 자신있게 스윙하자. 그러다 보니까 결과도 좋았던 것 같아요.
LG 간판타자였던 김재현(사진=LG) |
19살 대형신인의 등장에 LG와 야구팬들은 신났지만, 상대팀은 꽤나 신경 쓰였을 듯합니다. 원체 잘하다보니 오해도 많이 샀지요?
(물 한잔을 마시고서) 어떤 면에선 너무 건방지게 야구했던 것 같아요. 홈런 치면 그냥 베이스를 돌아도 되는데, 타석에서 레가드 ‘딱’ 벗고, 어깨 ‘딱’ 힘주고 돌고 그랬거든요. 겉멋이 들었던 거죠(웃음).
그땐 신인이 그러면 상대 베테랑 투수들이 당장 빈볼을 던지곤 했습니다.
그땐 야구장 분위기가 지금같지 않아서 설령 선배가 빈볼을 던져도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할 시대였어요. (뭔가 생각난 듯) 1994년 신인 때 롯데와 경기(주 : 1994년 4월 16일)를 하는데. 용빈이 형이 사이클링 히트에 도전하고 있었어요. 아마 2루타 하나만 남겨두고 있었을 거예요. 저도 5타수 3안타를 치면서 사이클링 히트에 도전하고 있었는데, 3루타가 부족했어요. 그날 점수 차가 10점 이상 났을 거예요. 흥분한 마음에 도루를 시도했지 뭐에요. (멋쩍은 표정으로) 네, 야구를 몰랐던 거죠. 이닝 마치고 더그아웃 들어왔는데 우리 팀 선배들이 “그러는 거 아니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순간 ‘아차’싶었어요.
롯데 배터리가 가만히 있던가요.
다시 타석에 섰을 때 롯데 포수가 강성우 선배였는데, 제가 그랬어요. “선배님 죄송합니다. 제가 뭘 몰라서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강 선배님이 웃으시면서 “야야, 괜찮다. 그럴 수도 있지 뭐”하시더라고요. 얼마나 고마워요. (표정이 확 바뀌며) 아, 그런데 투수가 던진 공이 바로 머리 쪽으로 날아오지 뭐에요(웃음).
이런.
3루타는 무슨, 사이클링 히트는 무슨, 일단 살고보자 싶더라고요(웃음).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때 난생 처음으로 ‘야구가 내 기분만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아요.
1994년 신인 3인 가운데 가장 어리고, 인기도 많았던 걸로 기억됩니다. 야구선수가 아이돌스타처럼 소녀팬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것도 김 코치가 원조가 아닐까 싶은데요. 그때 인기, 대단했지요?
그랬던 것 같아요. 하루에 150, 200통씩 팬레터가 오고 그랬으니까요. 인기가 정말 연예인 못지 않았으니까요. 돌아보면 그때 야구장 오시는 분들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어요. 세련된 분들도 많았고.
세련된 분들이라면…?
모델들도 많이 오시고, 미스코리아분들도 자주 찾아오셨던 것으로 기억해요.
자, 여기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코너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18년 전의 이야기니까 가볍게 웃고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데요. 그때 혹여 미스코리아분과 염문설에 휘말린 적은 없었습니까.
에이, 없어요. 있다고 해도 ‘지금은 말할 수 없다’(웃음). 정말 그런 건 없었고요. 그런 면에서 전 참 순진했던 것 같아요.
18년 전, 프로야구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던 신인 3총사도 이젠 나이가 들어 지도자로 ‘제2의 야구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김 코치가 기억하는 현역시절 유지현, 서용빈은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유지현 선배는 좋은 선수였어요. 무척 플레이가 영리했죠. 상대 팀에선 너무 영리하니까 싫어하는 스타일이었어요. 물론 우리팀 입장에선 최고의 선수였지만. 가만 보면 정근우(SK)랑 비슷했지 싶어요. 용빈이 형은 좀 남자답고, 젠틀했어요. 나이 든 여자분들이 용빈이 형을 좋아했고, 전 어린 여성분들이 좋아했던 것 같아요(웃음).
지금이야 LG가 약하니까 LG를 만년약체로 아는 젊은 야구팬이 있는데, 정말 LG는 90년대만 해도 강팀 가운데 강팀이었습니다.
그랬죠.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하고, 1997, 1998, 2002년 준우승했죠. (눈을 가늘게 뜨며) 정말 LG는 90년대 엔 강팀이었어요. 그땐 야구도 참 재밌게 했던 시절이었어요.
희귀질환도 꺾지 못한 김재현의 야구인생 1994년 신인왕에 뽑힌 유지현(사진 가운데)를 축하하는 김재현(사진 맨 왼쪽)과 서용빈(사진 맨 오른쪽)(사진=LG)
“김재현의 야구인생은 끝났다.” - LG 고위관계자 -
2002년 ‘고관절 무혈 괴사(대퇴골두 무혈성 괴사)’라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습니다. 당시 ‘고관절 무혈 괴사증’은 허리와 다리를 이어주는 고관절에 피가 통하지 않아 뼈가 썩어가는 희귀병으로 알려졌습니다. 자칫 선수생명까지 위태롭게 하는 병으로 알려졌는데요. 일부에선 ‘불치병’으로, 또 일부에선 ‘과도한 음주 때문에 걸린 병’이라고 하는 등 참 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대퇴골두 무혈성 괴사는 인공관절 수술 가운데 50% 이상을 차지하는 유병률이 적지 않고, 완치 확률도 높은 질환이었습니다. 음주 때문이라는 세간의 낭설과 달리 뚜렷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질환이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LG 구단은 김 코치에게 각서를 받았어요. 많은 이는 지금도 김 코치의 고관절 부상과 LG의 각서 요구가 결별의 원인이 됐다고 믿고 있는데요. 고관절 부상은 언제부터 시작된 겁니까.
2001년부터 고관절이 좋지 않았어요. 경기하다가 뛰면 고관절 부분이 상당히 아팠어요. 그러다 병원에 갔는데 이상한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상당히 기분이 나빴어요. (인상이 굳어지며) 사실 지금도 그때 이야기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당시 항간엔 ‘불치병’란 소리도 있었어요.
불치병은 아니었어요. 그저 당시로선 희귀성 질환이었죠. 그런데도 주변에서 자꾸 ‘불치병’이니 뭐니 하는 바람에 우리 식구들이 상당히 마음 아파했어요.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조금 화가 나요.
2002년 고관절 부상 이후 LG가 ‘각서’를 요구하게 됩니다. 내용인즉슨, ‘앞으로 일어나게 될 불의의 상황에 대해선 전적으로 선수 본인이 책임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김 코치가 각서를 쓰는 조건으로 LG는 재계약을 맺는데요. 김 코치의 마음이 어땠을까 궁금합니다.
(잠시 생각하다가) 그때 비로소 사회를 알았어요. ‘아, 이게 사회구나. 정에 이끌려서 움직이는 곳이 아니구나’ 싶었어요. LG를 정말 사랑했었기 때문에 더 가슴 아팠고, 젊었기 때문에 더 서글펐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솔직히 LG구단도 이해가 가요. 구단 입장에선 리스크를 줄이는 게 중요했을 거예요. 마침 롯데 고 임수혁 선배 일도 있었고.
LG를 떠나게 된 이유가 그것뿐이었나요.
FA(자유계약선수) 조건도 너무 안 좋았어요. 2년 동안 타율 2할8푼을 쳐야 비로소 계약금을 주겠다는 내용이었어요. ‘앞으로 일어나게 될 불의의 상황에 대해선 전적으로 선수 본인이 책임진다’는 각서도 또 써야 했고. 물론 구단 입장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그 계약안을 수용하면 좋지 않은 선례가 될까 걱정됐어요. LG구단과 마지막까지 협상했는데, 구단 입장은 그대로였어요. 결국 상처만 남았죠.
당시 LG 이순철 감독은 끝까지 김 코치를 잡으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압니다.
FA 문제로 이 감독님께 면담을 요청했어요. “감독님 이전에 야구선배로서, 제가 구단이 요구하는 각서를 받아들여 하는지 조언을 해주십시오. 과연 구단의 옵션안도 제가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알려주십시오. 너무 저 자신이 비참합니다”하고 말씀드렸어요.
이 감독이 뭐라고 대답하던가요.
감사하게도 “재현아, 넌 우리 팀에 꼭 필요한 선수다. 나는 널 절대 못 놔준다”라고 하셨어요. 사실 FA가 되던 2004년 제가 시즌 초반 타율 1할대를 맴돌 때도 이 감독님은 절 계속 믿고 내보내 주셨어요.
결국 마지막까지 LG와의 협상이 결렬되며 서울 잠실구장을 떠나 인천 문학구장으로 홈을 옮깁니다.
정들었던 구단을 떠난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에요. 전학이나 이사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에요. (어두운 표정으로)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바뀌는 기분이에요. 처음엔 새로운 팀에 적응하는 게 힘들더군요.
하지만, 누구보다 빠르게 SK에 녹아들었습니다.
좋은 동료, 좋은 코칭스태프, 좋은 구단 만나서 무리 없이 정착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좋은 팬분들을 만나 참 행복하게 SK에서 선수생활 할 수 있었어요.
“2007시즌 끝나고, 김성근 감독님께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2004년 11월 SK에 입단하는 김재현(사진=SK)
“2007년이지 싶은데. 우리가 졌다고. 그때 김재현을 선발로 안 쓰고 8회 대타로 썼다고. 결국은 삼진을 먹었어요. ‘딱’ 보니까 불만이 가득하더라고. 선수들이 다 있는 데서 내가 그랬다고. “너 이 녀석, 야구하기 싫으면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고 말이지. 자존심이 강한 아이니까 열이 받아서 ‘씩씩’ 대고 있더라고. 난 진심으로 김재현이 변하길 바랐어요. SK의 리더답게, 아직 몇 년간 제 실력을 보일 수 있는 강타자답게 변화하길 바랐어요. 그리고 감독이 김재현도 다른 선수들처럼 공평하게 대한다는 걸 보이고 싶었어요. 김재현은 대선수답게 감독이 뭘 바라는지 알아챘어요.“
- 전 SK 감독, 고양 원더스 김성근 감독 -
2005년 SK에 입단하자마자 그해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타율 3할1푼5리, 19홈런, 77타점으로 대성공을 거뒀어요. 1994, 1999시즌 이후 개인 역대 최고 시즌이었는데요. 김 코치의 활약을 보면서 LG팬들은 묘한 감정으느꼈는데요.
그해 오랜만에 골든글러브(지명타자)도 수상했어요. 2006년에도 타율 2할8푼7리를 기록했던 걸로 기억해요. 하지만, 2007년 갑자기 타율이 1할대로 ‘뚝’ 떨어졌죠(웃음).
맞습니다. 2007년 타율 1할9푼6리, 5홈런, 19타점으로 역대 가장 좋지 않은 개인성적을 거뒀습니다. 당시 야구계에선 “김재현도 한물갔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왔습니다. 그해 극도로 부진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가 담배를 거의 안 피워요. 그런데 2007년에 담배를 좀 피웠어요. 웬 줄 아세요?
글쎄요.
김성근 감독님 때문에 피웠어요(웃음).
김 감독님 때문에요? 원래 살가운 사이 아니었습니까.
2002년 LG에 있을 때 김 감독님과 관계가 무척 좋았어요. 제가 무척 존경한 분이었어요. 2006시즌이 끝나고, 감독님이 부임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솔직히 기대를 많이 했어요. 기대에 부응하려고 훈련도 나름 열심히 했고요. 그러다 2007시즌 한화와의 개막전을 앞두고 전력분석실에서 김정준 전력분석팀장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어요. (김)정준이 형이 “류현진이 이러 이렇게 투구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때 제가 농담으로 “형, 류현진이 좌타자한테 그렇게 강한데, 혹시 나 개막전에 못 나가는 거 아니야?”했어요. 정말 순전히 농담이었거든요. 정준이 형도 “설마 그런 일이 있겠냐”하더라고요.
설마 스타팅 멤버에서 빠지기라도 했을까요. 물론 저도 농담입니다.
아니요. 이게 웬걸. (눈을 크게 뜨며) 진짜 제가 빠진 거에요. 전광판을 봤는데 제 이름이 없는 거예요.
그래요?
선수에게 개막전이 갖는 의미는 커요. 그런데 못 나간 거예요.
개막전 선발명단에 제외된 이유가 뭐였습니까.
김성근 감독님께선 제가 좌타자한테 약하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실제로 2006시즌엔 좌투수한테 조금 약하긴 했어요. 하지만, 2002년 LG 감독이실 때 김 감독님은 유일하게 팀에서 저만 플래툰시스템을 적용하지 않으셨어요. 좌투수가 나와도 “재현이는 좌투수 공도 잘 친다”며 계속 저를 타석에 내보내셨어요. 그런 분이 SK 오셔서 좌투수만 나오면 빼시니 납득이 안 갈 수밖에.
다음날은 어땠습니까.
다음날은 다행히 우완 문동환 선배가 등판해서 스타팅 멤버로 출전했어요. 아마 제가 3타수 1안타를 쳤을 거예요. 팀도 이겼고. 개막 3연전 마지막 날, 한화 선발을 보니까 좌완 세드릭 바워스더라고요.
그때도 선발에서 제외됐습니까.
네, 또 못 나갔어요. 그때부터 좀 이상하게 분위기가 흘러가더군요.
홈 개막전 땐 상황이 좀 다르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대전 한화 3연전을 끝내고, 인천에서 홈 개막 3연전을 삼성과 치르기로 돼 있었어요. 1차전 삼성 선발이 전병호 선배였어요.
LG 시절 전병호의 공을 잘 쳤던 것으로 압니다. 당연히 출전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아니요. 또 못 나갔어요. 개막 4경기 가운데 3경기를 못 나간 셈이었어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을 듯합니다.
완전히 맛이 갔죠. 그래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타로 출전했어요. 마침 투수가 좌완 권혁이었는데, 전력분석팀에서 “권혁 쿠세(투구습관)을 잡았다”는 거예요. 쿠세만 믿고 타석에 들어갔는데….
들어갔는데?
이런 세상에….
왜요?
(절망한 표정으로) 쿠세가 틀리지 뭐에요. ‘딱’ 삼진 먹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데, 이거 감정이 복잡해지더라고요. 그래도 그때까지 ‘꾹’ 참았어요. 그러다 경기 끝나고 감정이 폭발할 뻔 어요.
아니 왜요?
그 경기가 끝나고 김 감독님이 전체 미팅을 하셨어요. 감독님께서 ‘딱’ 한마디만 하시더라고요.
무슨 말씀을 하셨을지 궁금한데요.
“너, 그 딴식으로 야구하려면 그만둬!”
아...
속에서 참았던 말들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오려고 하더라고요. 그때 정말 ‘꾹’ 참았어요. 그래도 감독님이 어른이시니까 제가 반항할 리는 없었겠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았어요. 감독님이 가시고, 더그아웃에 앉아 있는데, 이만수 수석코치님이 오시더라고요.
뭐라고 위로하던가요.
“감독님이 하시는 말씀 잘 들었지. 재현아, 앞으로 더 열심히 하자”하시더군요. 그래 제가 그랬어요. “수석코치님은 제가 어떻게 준비했는지 잘 보지 않으셨습니까. 나름대로 제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하는지 보지 않으십니까” 했어요. 수석코치님이 절 데리고 멀리 가시더라고요. “그래도 네가 이해해야 하지 어쩌겠니”하시더군요.
SK 김재현(사진=SK) |
줄곧 순탄한 야구인생을 살았던 김 코치 입장에선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겠어요.
선수들 다 집에 가고, 혼자 더그아웃에 앉아있으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어요. ‘이건 아니다. 이렇게는 야구하고 싶지 않다’란 생각이 들더군요. 아마 그날처럼 술을 많이 마신 날도 없을 거예요. 호준이가 서울까지 날아와서 절 위로해줬어요.
이후로도 계속 좌투수가 나오면 선발 명단에서 빠졌나요.
네, 그런 생활이 계속 반복됐어요. 멘탈(정신)이 무너졌으니 야구가 잘 될 리 없었죠.
어떻게 돌파구를 찾았습니까.
너무 자존심이 상해 상처받고 있을 때 와이프한데 조심스럽게 이야길 꺼냈어요. “자존심이 너무 상해서 여기서 (야구를) 끝내야겠다”라고 진지하게 이야기했어요.
아내분 충격이 상당했겠군요.
찬찬히 제 이야기를 듣고 와이프가 그러더군요. “오빠가 지금 야구를 그만둬도 상관없는데…지금 그런 이유로 야구를 그만두는 건 오빠답지 않은 것 같아. 지금껏 내가 본 김재현 같지 않아.”
음.
그 말을 듣고 나니 무슨 커다란 해머로 머릴 맞은 것 같았어요. 이 세상에서 날 가장 잘 안다는 와이프가 그렇게 이야기할 정도면 문제는 감독님이 아니라 나한테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내분이 핵심을 찌른 거군요. 제가 봐도 감독 이기는 선수는 없습니다.
그때부터 경기 끝나고 돌아와서도 새벽까지 스윙연습을 했어요. 물론 그래도 야구는 이전처럼 잘 되지 않았어요. 훈련할 때 “잘하자” 다짐하고도 막상 구장 나가면 그게 잘 안 됐어요. 그렇게 어찌어찌 시간이 흐르다 그해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끼었어요. 1차전에서 선발로 나갔는데 3타수 1안타인가를 쳤어요. 하지만, SK가 두산에 1, 2차전 모두를 졌어요. 감독님께서 월요일 쉬는 날이었는데, “다 쉬고, 나올 사람만 자율적으로 나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래 집에서 휴식을 취했습니까.
전 그때 은퇴할 마음을 갖고 있었어요. 솔직히 말이 좋아 은퇴지, 못 해서 잘릴 위기였죠. 그래도 구장에 나갔어요. 집에 있으면 잠도 안 오고, 화만 나고 그랬으니까요.
제가 맞춰볼까요?
네?
구장에 감독님이 나와 계셨지요?
하하, 어떻게 아셨어요. 선수들 보고 자율훈련하라고 하시고선 감독님은 나와 계시더라고요(웃음). 그날 자율훈련에 안 나온 선수가 (이)진영이었어요.
왠지 반전이 기대되는데요.
3차전에 진영이 대신 제가 스타팅 멤버로 출전했어요(웃음). 그날 5타수 2안타 1타점을 기록했을 거예요. 3차전을 SK가 이기면서 시리즈 전적 1승2패가 됐어요. 4차전에서도 선발로 나갔는데 그날은 조동화와 함께 연속타자 홈런을 기록했어요. 그 경기에서도 (김)광현의 호투로 우리가 두산에 이겼어요.
저도 기억합니다. 당시 시리즈 전적 2승2패로 SK와 두산이 팽팽한 접전을 펼쳤지요. 5차전에서도 김 코치의 방망이가 신들린 듯 폭발합니다.
그때 7회까지 0대 0으로 투수전이었어요. 그러다 제가 8회 주자 2루에서 (임)태훈이를 상대로 결승 3루타를 치면서 우리가 이겼어요.
김 코치의 ‘캐넌 홈런’이 다시 터진 건 6차전이었습니다.
3회 2대 1로 앞서고 있을 때, 다시 태훈이를 상대로 솔로 홈런을 쳤어요. 지금 생각해도 선수생활하면서 가장 짜릿했던 순간이 아닐까 싶어요.
김재현은 SK의 레전드이기도 하다(사진=SK) |
당연히 그해 한국시리즈 MVP는 타율 3할4푼8리, 2홈런, 4타점을 기록한 김 코치였습니다.
(잠시 당시를 회상하다가) 지금까지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인데요.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고 선수단이 괌으로 떠났어요. 선수단 전체가 감독님과 함께 기분 좋게 맥주 한잔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그 시간이 끝날 즈음 제가 감독님한테 면담을 요청했어요.
면담이요?
감독님께서 얼큰하게 취하셔서 “뭐 때문에 그러느냐”고 물으셨어요.
한국시리즈 MVP 수상과 관련해 감사의 인사라도 전했나요.
아니요. “감독님, 저를 자유계약으로 풀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트레이드를 시켜주십시오.”라고 부탁했어요.
네? 그건 팀을 떠나겠다는 뜻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고향팀에서 뛸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라고 진지하게 부탁했습니다. 그때는 저도 감독님께 쌓은 게 정말 많을 때였으니까요.
김 감독님도 무척 당황했겠습니다.
한동안 말씀이 없으셨어요. 그러다 조용히 “네가 상처가 있었구나”하셨어요. 제 의지가 원체 강하니까 감독님께서도 “그래, 알아보자. 알아볼게” 하시더군요.
하지만, 은퇴할 때까지 김 코치의 소속팀은 SK였습니다.
전 당장이라도 트레이드를 시켜주실지 알았어요. 그런데 그날 이후 가타부타 말씀이 없으시더라고요. 그때 결심했죠. “내가 SK를 나갈 때까지 이분한테 맞추면서 살아야겠다”라고요(웃음). 좀 더 일찍 깨달았으면 2007년 타율이 1할까진 내려가지 않았을 거예요. 그때 1할 치는 바람에 통산 타율도 3할이 아닌 2할9푼4리로 끝났죠.
면담까지 했으니 대개 감독이라면 선수 입장을 어느 정도 수용해 다음 시즌부터 출전횟수를 늘려줄 텐데요. 김 감독님은 어땠습니까.
변화 같은 거 없었어요. 플래툰 시스템은 똑같이 적용하셨어요. 은퇴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웃음). 그래도 2008년엔 제 마인드가 변해선지 타율이 3할1푼으로 크게 올랐어요.
김성근 감독과 김 코치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애증의 관계’가 아닐까 싶어요. 선수 입장에선 ‘애’보단 ‘증’이 강했을 것 같은데요.
참 아이러니한 게요. 제가 김성근 감독님을 존경한다는 거예요. 저한테 그렇게 하시긴 했지만, 인정할 부분은 인정해야 한다고 봐요.
어떤 점이 특히나 인정할 부분이라고 생각하세요.
야구인 가운데 가장 존경하는 분이에요. 제가 본 야구인 중에서 그분만큼 야구에 대한 열의가 강한 분은 없었어요. 그분처럼 야구만 생각하는 분도 없었고요. 제게 상처도 많이 주셨지만, 돌아보면 참 정도 많았던 분 같아요.
“SK 야구를 보고 지도자의 길을 선택했다.” 2009년 SK 대표로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시상하는 김재현(사진=SK)
“SK는 야구를 할 줄 아는 팀이다. 왜 이겨야하고, 어떻게 이기는지 잘 아는 팀이다. 그 중심에 김재현이 있다.”
- KBS 이용철 해설위원 -
2009년 SK는 한국시리즈에서 KIA에 3승4패로 패합니다. 하지만, 다음 해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에 4승무패로 완승을 거둡니다. 1년 사이 이렇게 팀이 변할 수 있을까 싶은데요.
지금 돌아보면 한 경기에 대한 소중함을 그때 처음 느낀 것 같아요.
한 경기의 소중함이요?
2009년 정규 시즌에서 1위 KIA하고 2위 SK의 경기 차가 불과 1경기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때 KIA가 81승, SK가 80승이었어요. 패는 되레 KIA가 SK보다 1패가 더 많았어요. 무승부도 SK가 6번, KIA가 4번이었어요. 예전 승률로 하면 SK가 1위였지만, 그해는 무승부를 모두 패로 계산하면서 SK가 2위가 되고 말았어요.
정작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기억나실지 모르겠는데, 그해 시즌 중반 광주 KIA전에서 연장 12회에 최정이 마운드에 올랐어요. 그때 (최)정이가 결승타를 맞고 우리가 졌어요. 그 경기라고 단정하기 어렵지만, 그 경기는 분명히 1년 농사를 좌우하는 중요한 경기였어요. 결국 그 경기를 내주고, SK가 정규 시즌 2위가 되면서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쓰라린 아픔을 맛보게 됐습니다.
그렇군요.
전 2009년의 패배 때문에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을 4대 0으로 쉽게 이길 수 있었다고 봐요. 왜냐? SK 선수들은 한 경기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전 2010년 한국시리즈를 준비할 때부터 우리가 일방적으로 이길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어떤 면에서지요?
SK 선수들이 한국시리즈를 임하는 자세가 완전히 달랐어요. 한국시리즈 미디어데이에서 제가 “4승2패인가 3패로 SK가 이길 것”이라고 했는데 속마음은 ‘4대 0’이었어요. 벌써 선수들 움직임이 달랐어요. 우리끼리 그런 농담도 주고받았어요. “관중수입도 있으니까 서울 가서 끝내자”고. 하지만, 다들 한 경기에 대한 소중함이 얼마나 절실한지 알기에 “대구에서 끝을 내자”라고 한목소릴 냈어요. 한 경기의 소중함, 전 정말 큰 교훈이었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당시의 교훈이 이어지고 있다고 봅니까.
글쎄요. 2년 동안 팀을 떠나 있어서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만수 감독님도 분명히 장점이 있는 분입니다. 전 그 교훈을 SK 선수들이나 코칭스태프가 잘 간직하고 있으리라 믿어요.
SK에서 6년간 뛰었습니다.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과 3번의 우승을 경험했어요. 누구보다 SK 야구를 잘 알지 않을까 싶은데요. 우리가 흔히 SK를 가리켜 ‘야구를 할 줄 안다’는 평을 하곤 합니다. SK는 야구를 할 줄 안다, 김 코치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설명해줄 수 있을 듯싶습니다.
2009년 은퇴를 예고했지만, 그렇다고 홀가분한 심정은 아니었어요. 저도 인간이다 보니까 속상하고, 짜증나고, 정신적으로 고통이 심할 때가 있었어요. 그러다 한 달 정도 ‘될 대로 되라’라는 심정으로 뛴 적이 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니까 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후배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당연히 팀이 정상일 리 없었죠. 그래서 제가 선수단 전체 미팅을 소집했어요. 그 자리에서 솔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네.
“나는 올 시즌 끝나고 분명히 은퇴한다. 나도 팀에서 이런 점들이 마음에 안 든다. 그래서 솔직히 한 달 전부터 마음을 놨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선수들한테 물었어요. “우리가 정말 야구를 지저분하게 하느냐”고요. 선수들이 “다 아니다”라고 했어요. 우리는 잘하면 잘할수록 모든 비난의 화살을 받고 있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게 있었어요.
그게 뭡니까.
(강한 어조로) 우리는 비난받으려고 스프링캠프서부터 그렇게 열심히 훈련한 게 아니었어요. 강도 높은 훈련이 정답은 아닐지 몰라요. 하지만, 우리는 최소한 우리 스스로에게 떳떳하려고 다른 팀보다 몇 배는 고되게 훈련했고, 정당하게 이기기 위해서 입에 단내가 나도록 훈련한 거였어요.
네.
마지막으로 선수들한테 그랬습니다. “우리가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는데, 순간의 기분에 못 이겨서 포기한다면 지금껏 쌓아온 게 너무 아깝지 않으냐”고. 많은 사람이 갖고 있는 생각이 맞지 않다는 걸 증명하려면 더 열심히 뛰는 길밖엔 없었어요. 그때부터 선수들이 다시 뭉치기 시작했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고 그때부터 SK 선수들은 절대 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다른 선수에게 폐 끼치지 않는 길은 자기 역할을 100% 해내는 것밖에 없다라는 걸 SK 선수들은 잘 알고 있었어요. 박 기자님, 일전에 ‘그라운드엔 9명의 김광현이 있었다’라는 기사 쓰셨죠?
올 시즌 김광현이 컴백하고 첫 승을 따냈을 때 쓴 기삽니다.
그 기사를 보고 상당히 공감했어요. SK 선수들이 그랬다죠. “우리 에이스가 던지는데 잘해야죠”라고요. 참 멋있는 생각 아닙니까? 속으로 ‘아직도 SK 선수들은 그런 마음을 갖고 있구나’싶어서 정말 자랑스러웠어요. 만약 류현진과 광현이랑 붙어요. 현진이는 정말 에이스급 투수죠. 광현이보다 나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때 팀원들이 할 일은 “우리가 광현이를 위해 어떻게든 류현진을 잡아야 한다”는 각오에요. 우리가 우리 에이스를 챙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 그것이 팀 워크고 프로의식이에요. SK 선수들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게 SK 야구에요. (김)광현이가 야구 좀 한다고 건방 떨고 했으면 엄청 혼이 났을 거예요. 팀에서 인정받지도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걔 역시 그렇지 않아요. SK의 김광현이지, 김광현의 SK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런 의식은 누가 만든 겁니까.
(비장한 목소리로) 누가 만든 게 아니에요. 선수들 스스로 만든 거예요. 어린 김광현부터 최선참 박경완 선배까지 선수들 스스로 아픔을 겪으면서 만든 거예요. 전 지금도 SK 선수단의 그 의식이 참 멋있다고 생각해요. 오늘 처음 고백하는데요. 일전에 박 기자님이 “왜 갑자기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느냐”고 물으셨지요.
그랬지요.
지금 답을 드릴게요.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에 4대 0으로 이겼을 때, 그제야 야구를 한번 진지하게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SK 선수들을 보면서 ‘이렇게 선수들 스스로 움직이면서 야구를 할 수 있구나’ 감탄하고, 그 야구에 매료됐어요. 그래요. SK 같은 팀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그게 제가 지도자가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2010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김재현은 2011년 미국 프로야구 연수 길에 올랐다(사진=김재현) |
현역시절 가가장 기억나는 순간을 꼽는다면 언제인가요.
두 가지 기억이 나요. 먼저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임)태훈이와의 승부가 기억에 남고요. 두 번째는 2010년 전반기에(주 : 2010년 5월 17일) 두산과의 경기에서 캘빈 히메네스한테 기록한 역전 3점 홈런이 기억나요.
LG에 있던 때는 언제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LG에 있을 때도 기억나는 일이 참 많아요. 구체적으로 ‘딱’ 꼬집긴 어렵지만, 줄무늬 유니폼을 입었던 기억은 다 좋았던 것 같아요(웃음).
그럼 반대로 가장 마음 아팠던 때는 언제에요?
아무대로 2004년 LG를 떠났을 때죠. 2007년엔 자존심이 상해서 아팠었고요.
‘캐넌히터’ 김재현이 사는 법 은퇴식에서 오랜 친구 이호준(사진 왼쪽부터)과 포옹하는 김재현(사진=SK)
“갑자기 은퇴를 선언한 게 아니다. 이미 가족과 상의했다. 부모님과 항상 나를 믿는 장인, 장모님 그리고 내게 가장 소중한 와이프와 심사숙고해 결정했다. 하필 2009년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은퇴를 발표한 이유는 내 은퇴가 SK 선수들에게 동기부여가 되길 바랐다. 당시 주축선수들이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한 터라, 어쨌거나 나라도 희생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
- LG, SK 출신, 요미우리 2군 코치 김재현 -
37살(원래는 38살)이면 아직 현역으로 뛰어도 무방한 나이입니다. 은퇴할 때까지 몸 관리도 잘했고, 성적도 좋았습니다. 특히나 좀 더 현역으로 뛰었으면 2천 안타를 무난히 달성했을 텐데요.
개인통산 1천681안타를 기록했으니 319안타만 쳤으면 2천 안타를 달성할 수 있었어요. 저도 충분히 달성했을 거라고 봐요. 하지만, 기록에 연연하면 제가 원하던 모양의 은퇴는 하지 못했을 거예요. 물론 제가 화려한 성적을 내고, 그런 건 아니에요(웃음). 그저 제가 보여주고 싶은 삶이 있었어요.
어떤 삶이었습니까.
어려서부터 많은 선배를 보면서 ‘난 저렇게 은퇴하지 말아야지’하는 생각을 했어요. 은퇴도 정말 멋있게 하고 싶었어요. 물론 제가 정답은 아닐지 몰라요. 더 좋은 기록과 성적을 내고 은퇴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은퇴, 혹시 후회하지 않습니까. 물론 개인적으론 김 코치의 은퇴야말로 한국야구 사상 가장 아름다운 은퇴라고 생각합니다. 1년 전부터 팬들과의 이별을 차근차근 준비한 예고 은퇴였으니까요.
누구나 은퇴하고나서 후회해요. 하지만, 전 준비가 돼 있었어요. 세월이 지나도 아쉬움은 늘 있을 거예요(웃음). 그러나 후회는 없으리라 봅니다.
지난해 10월 1일 문학구장에서 뒤늦은 은퇴식이 열렸습니다.
좋은 동료, 좋은 코칭스태프, 좋은 구단을 만나 실력에 비해 과분한 은퇴식을 한 것 같아요.
SK팬뿐만 아니라 많은 LG팬이 김 코치의 마지막을 함께 축복해줬습니다.
은퇴 경기를 LG와 했으면 더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원래 LG전에 맞추려고 했는데 한번은 태풍으로 취소됐고, 또 한번은 일정 때문에 무산됐어요. 정말 아쉬웠어요. 저를 응원해주셨던 두 구단 팬들께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LG, SK 모두 잘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있었던 팀이라선지 지금도 일본에서 다른 팀보다 두 팀 경기를 더 유심히 보게 돼요.
만약 한국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면 어느 팀 유니폼을 입을 생각입니까.
(손을 흔들며) 제가 명예의 전당 현액감은 아니죠.
그건 차후 야구사가(史家)들이 알아서 결정할 일 같습니다.
모르겠어요. 좀더 생각을 해봐야할 것 같은데요(웃음).
지도자도 선수 만큼 재밌습니까.
재밌죠. 현역 때는 (야구) 하는 재미가 있고, 지금은 (야구를) 가르치는 재미가 있고(웃음).
김재현의 은퇴식에서 LG팬들이 그의 등번호가 새겨진 유니폼을 들고 축하해주고 있다(사진=SK) |
먼 훗날 어떤 감독이 되고 싶습니까.
지금은 견문을 넓히면서 배우는 단계라고 봐요. 물론 최종목표는 감독이겠지요. 가능하다면 SK 같은 팀을 만들고 싶어요. 그러려면 선수 관리서부터 구단과의 관계 등 세세한 것들을 차분히 배워야할 듯싶어요.
마지막으로 늘 묻고 싶던 말이에요. ‘캐넌히터’란 별명은 어떻게 생긴 겁니까.
예전 스포츠조선에서 근무하던 이유현 기자님이 지어주셨어요. ‘대포 타자’, 솔직히 나쁘지 않더라고요. 대박은 아니더라도 대포처럼 한 순간을 위해 오랜 시간을 장전해 있다가 우직하게 앞만 보고 날아가는, 괜찮지 않습니까(웃음).
이름 : 김재현(金宰炫)
생년월일 : 1975년 10월 2일
체격 : 177cm / 80kg
이력 : 신일고-LG-SK-LA 다저스 연수-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
프로입단 : 1994년
통산성적 : 개인통산 1천770경기 출전, 타율 2할9푼4리, 1천681안타, 201홈런, 939타점/ 1994, 1998년 골든글러브(외야수), 2005년 골든글러브(지명타자), 2007년 한국시리즈 M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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