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는 <1973년의 핀볼>에서 이렇게 적었다. ‘난 45년을 살면서 한 가지밖에 터득하지 못했어. 이런 거지. 사람은 무슨 일에서든 노력만 하면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고 말이야. 아무리 진부하고 평범한 일이라도 반드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어. 그 어떤 면도칼에도 철학은 있다고 어디에선가 읽었는데. 실제로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지 않을까.’
면도칼에도 철학은 있다. 하물며 228번의 위기를 넘어선 마무리 투수라면.
대구구장에는 1일 저녁 어스름과 함께 붉은자주빛 노을이 외야 담장 너머에 걸렸다. 외야가 서쪽을 향한, 잘못 지어진 야구장의 의도치 않은 효과다. 야구장에 ‘라젠카 세이브 어스’가 울려 퍼졌고, 마무리 투수 오승환이 마운드에 올랐다.
붉은 노을을 등에 지고, 오승환은 씩씩한 직구를 던졌다. 어쩌면 긴장했을지도 모른다. 서건창을 향한 2구는 안타가 됐다.
마무리 투수를 철학자로 만드는 것은 고독이다. 그라운드의 가장 높은 곳, 마운드에 오른 마무리 투수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스코어링 포지션 등 뒤의 주자는 압박을 넘어 고통이다. 고독은 철학을 만든다.
하이데거는 ‘불안’을 존재의 근본의식으로 규정했다. 인간은 세상에 내팽개쳐진 존재다. 마무리 투수도 같다. 동료가 만들어준 아슬아슬한 리드를 지켜야 하는 상황. 고독한 마운드에서 믿을 것은 자기 자신의 공뿐이다.
오승환은 다음 타자 이택근을 맞았다. 152㎞짜리 직구가 한복판 낮은 곳을 향했다. 이택근의 방망이가 허공을 갈랐다. 오승환이 가장 믿는, ‘돌직구’였다.
6년 전 오승환에게 마운드의 고독을 물었다. 오승환은 “승부차기 키커보다 마무리 투수가 더 힘들지 않을까”라고 답했다. 오승환은 “승부차기는 경기를 비긴 다음에 차는 데다 골 넣을 확률도 높다. 그러나 마무리는 팀이 이겨놓은 경기에 나가고, 내 뒤엔 아무도 없다. 공 30개 중에 한 개만 잘못 던져도 팀이 고생해서 만들어 놓은 승리를 날린다”고 했다. 별명 ‘돌부처’ 그 안쪽에 있는 불안과 긴장은 마무리 투수의 존재 이유다.
강병식을 내야 뜬 공으로 처리했다. 주자는 여전히 1루. 타석에는 유한준이 들어섰다.
고교 1학년 때 팔꿈치 인대가 끊어졌다. 거기서 야구가 끝인 줄 알았다. 외야수로 전향했다. 단국대 1학년 때 수술을 받았고 2년 동안 이를 악물고 재활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행복은 고통과 장애를 극복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했다. 오승환은 “아프지 않고 계속 마운드에 서는 게 목표”라고 했다.
마지막 공은 슬라이더였다. 526개째의 삼진이 228개째의 세이브를 완성시켰다. 포수 진갑용이 공을 열심히 닦아 건넸다. 오승환이 엷게 웃고 있었고, 모자 챙 너머로 노을이 붉게 걸렸다.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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