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데일리 = 김진성 기자] 노히트노런 실패에도 스토리가 숨어있다.
KIA 윤석민이 26일 대구 삼성전서 8회까지 볼넷 3개만 허용하는 노히트노런을 이어가다 9회 첫 타자 박한이에게 안타를 맞고 노히트노런에 실패했다. 이후 윤석민은 박석민에게도 안타를 내줬으나 후속타자들을 막아내고 완봉승을 따냈다. 26일 밤, 대구구장은 윤석민의 손끝에 들썩였다.
▲ 12명에게만 허락된 대기록
노히트노런. 투수가 완투 완봉을 하면서도 안타와 실점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 볼넷이나 사구, 실책으로 주자를 내보내는 건 상관이 없다. 투수가 단 한 타자도 출루시키지 않고 승리할 경우에 부여하는 퍼팩트게임보단 한 단계 아래의 기록이지만, 한국프로야구 31년 역사에서 단 12차례만 성립된 대기록이다.
역사상 첫 노히트노런은 1984년 5월 5일 방수원(해태)이 광주 삼미전서 달성했다. 가장 최근의 기록은 2000년 5월 18일 송진우(한화)가 광주 해태전서 달성했다. 이후 12년간 잠들어있다. 송진우는 34세 3개월 2일로 최고령 노히트노런의 주인공이다. 1993년 4월 30일 김원형(쌍방울)이 전주 OB전서 20세 9개월 25일에 기록한 노히트노런은 최연소기록이다. 또 1990년 8월 8일 이태일(삼성)이 부산 롯데전서 기록한 노히트노런은 사상 첫 신인 노히트노런이었다.
한편, 박동희(롯데)는 1993년 5월 18일 부산 쌍방울전서 6이닝 6탈삼진 1사사구로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당시 박동희는 6회 강우콜드가 되는 바람에 약간의 행운을 얻었다. 또한, 정명원(현대)은 1996년 10월 20일 인천 해태전서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는데, 그 경기는 한국시리즈 4차전이었다. 정명원의 노히트노런은 한국프로야구 유일의 포스트시즌 노히트노런이다. 때문에 정규시즌으로만 한정하면 노히트노런은 총 11차례 달성된 기록이다. 만약 윤석민이 26일에 노히트노런을 했다면 한화 송진우 투수코치 이후 12년만에 KBO 통산 12호 주인공이 될뻔했다.
▲ 노히트노런 실패 그 이후, 투수에겐 무슨 일이
노히트노런이 어렵다는 건 누구나 잘 안다. 특히 경기 후반에는 투수 본인도 기록을 의식하기 때문에 몸에 힘도 들어가고 과도한 긴장을 하기 마련이다. 구위가 좋더라도 마인드 컨트롤에 실패해 아쉽게 대기록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케이스가 수두룩하다. 윤석민도 26일 경기 외에도 지난 5월 11일 광주 두산전서 8회 1사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했으나 손시헌에게 안타를 맞고 기록이 무산됐다.
보통 경기 중반에 기록이 깨질 경우 투수가 마인드 컨트롤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있다. 하지만, 8~9회에 기록이 깨질 경우 상실감이 만만치 않다. 윤석민은 11일 경기 이후 17일 대구 삼성전서 3이닝 6실점으로 무너졌다. 지난 6월 24일 이용훈(롯데)도 잠실 LG전서 8회 1사까지 퍼펙트 피칭을 이어가다 최동수에게 안타를 맞은 뒤 연속안타를 내줘 완투, 완봉승마저 놓쳤다. 이후 30일 두산전서 3⅓이닝 3실점으로 조기 강판됐다. 상실감 외에도 직전 경기서 대기록 목전에서 무너진 투수의 경우 몸에 힘이 들어가면서 투구 밸런스가 흔들리고 정신적, 체력적으로 부침을 겪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대기록 실패 이후에도 꿋꿋하게 좋은 피칭을 한 케이스도 있다. 지금도 회자되는 1997년 5월 23일 대전 OB전서 기록한 한화 정민철의 노히트노런이다. 그는 8회 1사까지 퍼펙트 피칭을 한 뒤 심정수를 헛스윙 삼진으로 처리했으나 포수 강인권이 공을 뒤로 빠뜨려 심정수를 스트라이크 아웃 낫아웃으로 1루에 보내줬다. 하지만, 정민철은 이후 흔들리지 않고 다섯 타자를 차례로 돌려세우면서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다음 등판인 28일 롯데전서도 8이닝 2실점으로 좋은 기록을 남겼다. 체력적, 정신적인 부분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이긴 사례다.
▲ 정형식의 기습번트에 쿨한 반응 보인 윤석민
윤석민도 26일 대구 삼성전 완봉승 이후 “기록을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쉽게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행운도 바랐다”고 털어놨다. 사람이라면 당연한 솔직 고백이다. 그의 인상적인 코멘트는 또 있었다. “정형식이 희생번트를 댄 것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신인급 선수라 충분히 그럴 수 있다”라고 했다.
8회 2사 후 타석에 들어선 정형식은 초구에 번트를 댔다. 기습번트였다. 윤석민은 이 타구를 직접 잡아 아웃시켰다. 정형식으로선 어떻게든 공격의 물꼬를 틀기 위해 윤석민을 뒤흔들었다. 흔히 말하는 야구 불문율엔 ‘투수가 대기록에 도전할 때 기습번트를 시도하지 마라’는 게 있다. 타자들이 풀스윙으로 당당하게 기록을 깨라는 의미가 함축돼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유례가 된 것인데, 국내 실정과 100% 연관 짓기엔 무리가 있다. 정형식은 팀이 대기록의 희생양이 되기 싫어 최선의 플레이를 했다. 기습번트를 무조건적으로 당당하지 못한 공격이라 할 수도 없고, 이를 이해한 윤석민도 쿨하게 넘겼다.
▲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인 관중석과 기자실
대구구장의 삼성 팬들도 윤석민이 7~8회까지 노히트노런을 이어가자 심하게 술렁였다. 삼성이 대기록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초조함 반, 한편으로 12년만에 대기록을 직접 지켜볼 지도 모른다는 설렘 반이 교차했을 것이다.
기자실에서도 묘한 풍경이 연출됐다. 야구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대기록을 눈앞에 두고 그 사실을 말해버리면 기록이 깨진다”는 속설이 있다. 기자들도 경기 중반 이후 윤석민의 노히트노런 가능성 여부를 체크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쉽게 얘기를 꺼내진 않았다. 그저 12년만의 대기록이 나올 것에 대비해 자료를 찾는 등 분주한 모습이었고, 7~8회엔 묘한 기운이 돌았다. 이후 9회 첫 타자 박한이가 안타를 치자 기자실에서도 탄식이 흘렀다. 기자들도 사람인지라 대기록 탄생 가능성에 긴장을 하는 등 여러 감정이 교차했을 것이다.
2000년 5월 18일이후 무려 12년 4개월간 잠들어있는 노히트노런, 한국야구는 언제 정규시즌, 포스트시즌 포함 KBO 통산 13번째 노히트노런 투수를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모두가 그 속에 숨은 스토리를 공유하며 한국야구 역사의 페이지 한장을 장식할 수 있을까.
[윤석민, 송진우, 정민철. 사진 = 마이데일리 사진 DB]
(김진성 기자 kkomag@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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