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3일 목요일

장효조! 야구공에 찍힌 글씨를 보며 친다고?




나는 연신 시계를 보고 있었다. 열차 출발 3분전. 핸드폰이 없는 시절이었다. 이제는 나타난다고 해봤자 예정됐던 서울역 5분 인터뷰는 불가능했다. 그는 약속보다 30분 늦게 허둥지둥 달려왔다. 그가 처한 상황을 아는지라 지각을 추궁할 수도 없었다. 기차는 떠나려 하는데 내게는 열차표가 없었다. 난감했다. 결국 나는 그를 뒤쫓아 기차를 탔다. 나는 기자였다.

서울역을 출발하여 부산으로 가는 새마을열차 안. 88올림픽이 열리던 해였다. 그의 목적지는 동대구역. 우리는 세 시간 내내 열차 내 식당에서 맥주를 마셨다. 대전을 지날 무렵 두 사람 모두 어지간히 취기가 올랐다. 그는 원래 기자들에게 말을 아끼는 편이었는데 술술 모든 것을 털어 놓았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취중 토크’인 셈이다.

그의 이름은 장효조다. 지난해 55살의 한창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난 타격 천재. 그는 막 팀(삼성)으로부터 트레이드 통보를 받은 상태였다. ‘설마 내가…’ 하는 표정이 얼굴에 역력했다. 쇼크 상태였다. 87시즌 첫 MVP 수상의 감격에서 아직 채 빠져 나오기도 전이었는데. 술로 간신히 분을 삭이며 그는 많은 말을 들려주었다.

그의 야구 인생 비하인드 스토리는 놀랄만했다. 장효조는 대구상고 1학년에서 3학년으로 월반을 했다. 1학년 때 이미 전국구 스타가 된 그는 잘 나갈 때 좋은 대우를 받으라는 당시 강태정 감독의 배려로 1년을 건너뛰었다. 연세대와 고려대를 비롯한 숱한 대학들이 장효조를 원했다. 결국 서울에서 살 집과 누나의 취업을 제시한 한양대를 택했다.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대우였다.

대학시절 그는 절정의 타격감을 과시했다. 야구 인생을 통틀어 가장 잘 때린 시기를 그는 대학 2학년 때로 손꼽았다. 그가 직접 들려준 일화. 그 무렵 장효조는 투수가 던진 공에 찍힌 검지 손톱 크기의 ‘대한야구협회 공인구’라는 글씨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설마? 마지막 4할 타자로 유명한 테드 윌리엄스가 공의 실밥을 보고 타격을 했다는 전설적인 얘기가 있긴 하지만.

“술 취했다고 막 말하지 말라”는 나의 항의에 그는 거듭 “참 나, 정말이라니까”를 되풀이했다. 그의 눈빛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굳이 과장할 이유도 없었다. 사실임에 분명했다. 여전히 믿기는 힘들지만. 사람들은 원래 자신의 경험 밖 일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지 않나.

실업팀(포철)을 가면서 장효조는 또 한 번 놀라운 계약을 한다. 당시 박태준 회장과 직접 면담을 했다. 그를 좋아한 박 회장은 포항제철에 입단한 선물로 “뭘 해주면 좋겠냐?”고 물었다. 그는 넙죽 “독립해서 혼자 살고 싶으니 강남에 아파트 한 채만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박 회장은 거기에 별도의 보너스까지 챙겨 주었다.

군 입대도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공군 야구부(당시 성무)에 가기로 한 그는 입영 전날 늦게까지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그러고 집에 와보니 헌병 백차가 한 대 서있지 않은가. 다짜고짜 그를 태운 백차는 논산 훈련소 앞에 내려놓았다. 육군이 공군 선수를 빼앗아 온 것이다. 군인 정권이 아니고선 있을 수 없는 일. 훈련소엔 육군 야구단장(대령)이 와 있었다. 장효조는 월 100만원씩 용돈을 받기로 하고 육군 야구단에 들어간다. 당시 영관급 장교 봉급과 맞먹는 액수였다. 프로에 입단하면서도 그는 삼성의 로열패밀리 중 한 사람과 직접 만나 사인을 했다.

83시즌의 가장 큰 화제는 누가 수위타자가 되느냐 였다. 4할 타자 백인천과 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멤버인 김재박, 이해창, 장효조와 박종훈의 등장으로 1위를 점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장효조는 3할6푼9리로 수위타자를 차지한다. 홈런도 18개로 3위. 이 숫자는 90시즌 박승호가 20 홈런을 때리기 전까지 7년 동안 좌타자 최다 홈런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장효조는 전반기(당시엔 전 후기 제도) 재일동포 투수 장명부에게 12타수 무안타의 수모를 당했으나 후기 시작하자마자 5타수 4안타를 몰아쳐 빚을 갚는다. 5월엔 8타석 연속 안타의 대기록을 세우기도 한다. (2004년 SK 김민재가 9타석 연속 안타로 신기록을 세웠다.) 그 중엔 3연타석 홈런도 포함되어 있다. (2000년 당시 현대 박경완이 4연타석 홈런을 기록)

장효조는 큰 활약에도 불구하고 MVP와 줄곧 인연이 멀었다. 하지만 첫 MVP에 뽑히고 몇 달 지나지 않아 트레이드 소동에 휘말린다. 이 당시엔 불발에 그쳤지만 88시즌 종료 후 결국 롯데로 트레이드 된다.

20년간 야구기자로 활동하면서 참 많은 선수들을 만났다. 그들 가운데 장효조 만큼 목표의식이 뚜렷한 선수도 드물었다. 징기스칸은 “목표를 잃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조차 말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함께 인생을 논할 장효조는 이제 우리 곁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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